일제시대 일본을 뒤 흔든 사나이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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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일본을 뒤 흔든 사나이 '박열'


2022. 3. 19.

 

박열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시인이다. 또한 재일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가난한 농민 박영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인 1921년 정견 차이로 말미암아 김약수를 위시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을 위시한 아나키스트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된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인 '흑로회'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기관지 "〈후데이센진〉"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일본 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테이센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장난을 이용한 조롱이었다.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위시해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반일 활동을 더욱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에게 도움받아 피신하였으나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것을 '대역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재판 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비범한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 모두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이 옷은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인 조헌영 씨가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하였다.

이때 일본에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 언론이 보도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도저히 중범죄자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황은 조선에서도 1926년 8월 25일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도 내용을 보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박열에게 홍차를 권하고 만년필을 빌려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를 대상으로 해 "원래 열정가로 유명했다"고 평했고 다테마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열이 '우리 가족이 가네코 후미코의 얼굴을 모르니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을 가족에게 보내고 싶다'고 여러 번 애원해서 촬영했다"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박열과 후미코가 갑자기 이상한 모습을 해서 사진이 그렇게 촬영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진 원판을 그대로 버렸고 박열에게도 사진을 주지 않았는데도 왜 사진이 세상에 유포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1926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다테마스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 사진은 1925년 4월 9일에 촬영한 것이다. 취조는 4월 7일 끝났지만, 그로부터 2일 후 박열이 "우리 형에게 보내겠다"고 해서 촬영한 것이다. "모리 대역범이라고 해도 형제 간까지 죄가 있겠느냐" 싶어서, 나는 다만 인간애로 사진을 촬영했을 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진을 준 일이 절대로 없다.



이 스캔들은 다테마스 판사가 해임되고 정치 공세 탓에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를 부를 정도로 파장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2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로, 자살이라는 설과 당국의 암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후미코의 시신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수습하여 박열의 가족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한편, 현재 학계에는 박열이 수감도중인 1934년 전향했다는 설이 제기되어 있다.이는 박열이 형무소장에게 제출했다고 알려진 공순상신서, 감상록 등의 사료와 이를 보도한 각종 신문기사에 따른 것이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쓴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전 교수는 박열의 전향을 확실시하여 끝까지 지조를 지킨 가네코의 사상을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들 전향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저 역시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1935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2. "신속히 내지(일본)인과 합체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고 빨리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한일합병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1938년 6월 제출 감상록 중)

3.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기로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더라도 나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다... 이것은 폐하의 능위에 따른 것"(1945년 10월 27일 야마가타신문)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돼 있는데,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전향서의 문투가 박열의 문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2. 문서들에 전향에 이르게 된 경위가 설명돼 있지 않고, 너무 갑작스럽게 발표됐다는 점.

3. 박열의 사상전향은 그야말로 화젯거리이며 그만큼 일제의 선전성 역시 다분하였을 텐데 일간신문이나 대중 교양지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

4. 감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5. 출옥 후 김구 등 동지들이 별 반감 없이 박열을 환영, 추앙했다는 점이다.



1945년 10월 27일, 일본 아키다 감옥에서 22년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지금의 민단)이 발족하였다. 그리고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다만 박춘금 항목에 의하면 당시 민단은 구 친일파나 파시스트들이 제법 많았고, 박열은 초대 단장이 되었지만 이들과 갈등 끝에 결국 민단을 나갔다고 한다.



1948년 8월 15일에 일시 귀국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 6.25 전쟁 도중 납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보위부가 납북했다고 한다. 자진 월북한 인사들도 있었고, 반동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북한군과 보위부 고위 관계자들이 와서 "선생, 이곳은 위험하니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라며 설득하여 북한으로 데려간 예도 있었다. 조소앙과 김규식, 이광수가 이러한 모시기 공작으로 북으로 넘어가게 된 예이고 박열도 북한이 연행한 예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잔류했다고 한다. 아마 사진에서도 보이듯 당시 김구나 양근환 등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꽤 우려한듯.

어쨌든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간 후엔 6.25 전쟁 휴전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 단체에 대한 내용은 북한/정치 문서를 참조. 그러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 묘지에 있다. 한국에선 다른 납북자들이 자진 월북자로 도매금당하고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 예가 많은데, 박열은 그래도 해방 정국 5년 동안 뚜렷하게 반공 우익 노선을 탔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 월북한 게 아니라 북한 당국에게 강제로 납북당했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짧게나마 이것을 보도했고 사회장 수준으로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