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번쩍 서해번쩍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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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번쩍 서해번쩍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2014. 8. 7.

1. 태어난 해는?

1440년(세종22년)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야에쟌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홍길동의 처남)의 족보에는 正統八年 즉 1443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됨.


2. 태어난 곳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아치실)
→ 오늘날의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


3. 홍길동의 가족


▶ 홍길동의 어머니

옥영향(玉英香) - 관기(官妓)로 홍상직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배가 다른 홍길동의 두 형(귀동, 일동)의 어머니는 남평 문씨이다.

소설에서는 춘섬(春蟾)인데, 이는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이 자신의 애첩의 이름이 추섬(秋蟾)인데서 명명한 것이다. 춘섬은 봄 두꺼비라는 뜻으로 집안에 부귀와 복을 가져다 주는 염원이 담겨있다.

▶ 홍길동의 부인
고을노 -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며,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을 오키나와에 가져감.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다.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한다. 즉 홍길동 집단이 해외로 떠나면서 오곡의 종자를 항아리에 담아 함께 가져갔음을 추정케 한다.


4. 홍길동의 활동(국내)

가) 청년기 1460년(세조6년) ∼ 1470(성종1년)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 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葦嶺)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그후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그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서 병법과 무술을 배웠다.

장영기(張永己)라는 이름으로 변성하였으며, 전국 팔도(八道) 시장에 정보원(첩자)를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중 1469년(예종 1년) 10월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활동 무대를 서남해안의 섬으로 옮기게 된다.

나) 장년기 1471년(성종 2년) ∼ 1500년(연산군 6년)

관군에 좇겨 1469년 11월 중순에 전라도 영광 다경포(현재의 법성포)근처의 영평곶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신안군 압해도)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로써 활동범위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집단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직접 농사도 짓고 염전을 경작하고 어업활동을 했으며 상업활동(시장에서의 장사)까지 영위하면서 부패한 정부와 관료를 상대로 반봉건 투쟁을 벌였다.

*1470년(성종 원년) 관군의 집요한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하여 가짜 홍길동을 내세워 체포당하게 하는 계약을 꾸민 홍길동 집단은 남서해안의 여러 섬을 중심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간다.

*1485년(성종 20년) 11월, 명예욕이 강했던 전라도 도사 한건이 이들을 폭도로 몰아 강경진압을 결행하고 관아에 끌고가 매질하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자 홍길동 집단은 생업을 뒤로한 채 재무장 투쟁에 나서게 된다.

*1487년(성종 22년) 홍길동 집단은 물론, 생계유지를 위해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거도선(바닥이 평평하고 근거리 이동에 용이함)이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1489년(성종 24원년) 해상 통행증 발급 - 홍길동 집단을 색출하기 위해 바다를 왕래하는 사람을 상대로 통행증을 발급하여 활동을 원칙적으로 봉쇄함.

*1490년(성종 25년) 관군의 해상봉쇄작전으로 고립에 빠진 홍길동 집단은 2개조로 나누어 전라도 남해안 광양현(현재의 순천 광양만)으로 상륙을 단행한다. 그러나 또다시 관군에 쫓겨 지리산근처 임실 평당원에서 종적을 감춤.

*1495년(연산군 1년) 충청도 조령, 문경세재를 주요 활동지로 홍주와 공주를 생활근거지로 삼아 충청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힘. 특히 공주 무성산 정상(614m)에 요새를 쌓고 관군에 대항하며 집단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엄귀손 등 조정의 고위직 관리는 물론 지방의 수령, 아전, 유향소의 품관들까지 이들의 활동을 동조함.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무오사화(1498년)로 인해 상당수의 사림파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되고 수년에 걸친 전국적인 가뭄으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여 가족과 함께 함경도지방에 가서 살도록 하는 대 사면령을 내림. 이로 인해 홍길동 집단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하였는데, 강상죄(고위관직을 사칭하여 관리를 능욕한 죄)로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 의금부에 갇힘.

*1500년(연산군 6년) 11월 남해 삼천리 유배형을 받음.


5. 해외 활동기(오키나와 열도, 동중국해)

가)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정착

나) 1501 ∼ 1503년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지역에 집단거주지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다) 1504년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의 동북부 밀림지역으로 몰아내고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

라) 1505 ∼ 1508년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 추장인 마다후쓰를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

1. 우에구수쿠(宇江城) - 홍길동의 장남이 구축(섬의 최정상에 위치, 현재 일본 자위대 레이다기지가 설치됨)
2. 나카구수쿠(中城) - 홍길동의 차남이 조성
3. 구시가와구수쿠(具志川城)

마) 1510년

한문본 홍길동전인 위도왕전에서 그의 나이 70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바) 1543년

홍길동의 후예들이 해상 무역 활동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들이 이미 조선인이 아니라 하여 중국(明)에 돌려보냄.

사) 1609년

일본 본도의 싸쓰마번(임진, 정유재란시 조선인의 코와 귀를 가장 많이 베어간 인물임)의 유구국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감. 이로 인해 홍길동이 세운 오키나와 열도의 해상왕국도 복속됨.

h) 1612년 홍길동의 후예들이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탈출망명을 시도하여 배를 타고 경상도 앞바다에 도착,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일본군의 재침공으로 오인하여 한양(서울)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이 피난길에 올라 서울장안이 텅빔.
 

6.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전해 준 우리의 문화와 기술

가) 민속

- 줄다리기, 택견, 탈춤, 서낭당제, 용왕굿

나) 축성술

- 성 쌓는 기술

다 의술

- 당시까지 오키나와에는 의술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라) 쌀(볍씨), 대나무(시누대), 무궁화

마) 조선의 화폐(해동통보)

*최근 구지천성 발굴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되었으며 해동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최근 학계에서는 홍길동 집단이 오키나와를 지배하던 기간(1500 ∼1612년)에 오키나와현지에서 주조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7. 일본에 남아있는 홍길동의 유적지

가)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 홍길동 도래 기념비(현지에서는 탄생기념비라고 명기됨)
- 홍길동의 처남인 장전대주의 영웅기념비
- 모자(母子) 이별 제단(홍길동이 그의 어머니와 이별하여 석원도로 진출한 것을 기념)

나) 다케도미지마(죽부도)

- 우리나라 꽃 무궁화

다) 이시가키지마(석원도)

- 후루수토 유적(홍길동 집단 거주지로 현재 복원 중)
- 홍길동 추모비(일본 오키나와현 교육 위원회에서 1953년 건립)

-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아카하치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군웅할거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오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문명(文明) 18년(서기 1486년)오키나와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上眞王)ds 사신을 야에야마(八重山)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祀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탄압에 대하여 서주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반기를 들었다. 그는 중산(中山)에 대한 조공(朝貢)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尙眞王)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久米島)의 신녀(神女)인 군남풍(君南風)과 함께 정예부대 3000명과 병선(兵船) 46척을 보내 반란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防戰奮鬪)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底原)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명응(明應)9년(서기 1500년) 지금부터 454년전의 일이었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1953년 4월 6일 -
- 야에야마 박물관(조선에서 가져간 각종 농기구와 화폐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홍길동 집단의 족보를 소장)

라)미야코지마(궁고도)
- 동굴 우물 사당(홍길동 집단이 궁고도의 원주민과 처음으로 교류한 장소)
- 상비옥산 유적(도래인 주거지로 조선양식의 초가집이 8채 보존되어 있다.)

마) 구메지마(구미도)

- 우강성, 중성, 구지천성, 지나하성 등 홍길동 집단이 축조한 10여개의 성과 함께 이 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바) 오키나와 본도

- 오키나와 현립 도서관에 각종 문헌 자료 보존


8. 홍길동 집단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기록한 문헌들

가) 국내

- 택당집, 계서야담, 청구야담, 보(補) 해동이적, 성호사설, 홍길동전, 위도왕전, 만성대동보

나) 일본

- 구양, 팔중산 유래기, 팔중산도 연래기, 유구국 유래기, 구지천간절구기, 궁고사전, 궁고도 서민사

다) 중국

- 명사실록(明史實錄), 명사(明史)

홍길동의 문헌자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소설, 만화, 영화 속에서 신출기몰한 도술과 무예로 못된 탐관오리를 응징했던 "의적 홍길동"은 허구의 인물이 아닌 전남 장성 아치실 출신의 실존인물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은 한낱 소설이 아닌, 실존인물 홍길동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적 소설임이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장성군 홍길동생가 복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김흥식 군수)에 학술전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설성경(국문학 교수), 양권승(사학 박사과정)팀과 전남매일취재팀의 학술연구/현장탐사 등 학계와 언론이 공동으로 일궈낸 역사적인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우리군에서는 학술연구와 각종 문헌을 통해 홍길동이 장성사람으로 밝혀짐에 따라, 홍길동 생가 복원사업과 기념관 건립, 테마파크 조성 등을 통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개발할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증보 해동이적

순양자 황윤석이 홍만종의 "해동이적"을 증보하여 펴낸 조선시대 야담 "증보해동이적", '홍길동이 장성의 아차곡(아치실마을)에 살았으며, 첩의 자식이라 과거를 볼 수 없어 집을 떠나 의적활동을 하다 해외로 탈출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전 경판본(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꼽히는 홍길동전, 조선 중엽의 문신인 허균이 지은 것으로, 그의 제자인 택당 이식의 문집 "택당별집"에 '허균이 홍길동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양홍씨 남양군파 세보
조선조 말에 편찬한 남양홍씨 족보.
서자인 길동을 삭제하고, 홍상직의 아들로 일동과 귀동들만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선조실록 등)에는 홍길동이 강도 또는 도적인 실존인물로 1백여회 이상 기록되어 있다.

만성대동보
명문가의 족보들을 모아 성씨별로 주요 인물만을 기록한 것으로, 1920년경 편찬되었다.
만성대동보에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올라 있으며, '도술을 부렸던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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