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암살한 살인범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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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암살한 살인범의 최후


2023. 12. 7.

 

박기서님은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의 집을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그를 수제작 몽둥이 정의봉으로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살해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 당시 사건을 다룬 1996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수감된지 1년 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로는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살해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9세로, 부천시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의 버스 기사였다. 박기서는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은 뒤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살해를 결심한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사전답사했던 인천시 중구 신흥동 동명아파트 502호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동거녀를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준비해간 나일론 끈으로 손발을 묶고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옆방에 누워있던 안두희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라고 고함을 친 후 나일론 끈으로 두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다. 중간에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두들겼는데, 나중에 경찰이 와서 보니 방안에는 피가 흥건했고 피 묻은 정의봉이 나뒹굴었다.
 
 
 
제1심에서 검사의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상고심이 상고기각판결로 3년형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인 셈이다. 당시 법원은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만 보면 원칙을 고수한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안두희'라는 요소를 빼고 보면 해당 사건은 49세 장년이 면식도 없던 80세 노인을 찾아가 잔인하게 때려죽인 사건이다.
 
재밌는 점은 이렇게 법원이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엄청나게 관대한 판결을 했음에도 판결문을 읽어나가던 판사에게 일제에 부역하는 판사랑 뭐가 다르냐며 소리 친 방청객이 있었고 박기서측 변호인들도 무죄 판결을 선고했어야 했다며 사법부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세였던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일반적인 여론은 박기서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박기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안두희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의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1997년 1월 22일에는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용삼 등 서명자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법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도 줄을 섰다.
 
박기서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은 아들의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안두희는 1965년에도 곽태영이라는 김구 지지자에게 목을 찔려 살해당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인미수에 그친 곽태영이 박기서보다 더 중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박기서는 형이 확정된 이후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그 3년도 미처 채우지 않고 1년 4개월만에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출소 후 원래 일하던 소신여객에 복직하여 얼마간 근무했고, 이후 택시 기사로 이직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를 여러 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바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안두희는 이미 병 들고 힘 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두희의 눈을 보았는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역으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범행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족들은 인터뷰에서 평소 그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범행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한편 안두희 사망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구를 살해한 악행이 그대로 자신에게 있는 안두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십 년동안 여러 번의 린치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 이승만이 배후였다고 한 고백도 사실은 자신이 고문을 못 이겨 허위로 말한 것이라고 번복했던 점(당시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장택상은 외무부 장관도 아니었고 야인이었다) 등 때문에, 박기서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처단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고 하는 뜬소문도 있다. 박기서가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 시즌 2에 출연했을 때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회고를 했는데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서 해당 형사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진위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