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알카트라즈 '장항 수심원' 인권 유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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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알카트라즈 '장항 수심원' 인권 유린사건


2018. 5. 13.

장항 수심원은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 유부도에 위치해 있던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이다. 1974년 공권력 인가를 받은 뒤 최초 설립이 되었던 정신요양시설이며, 1997년 폐쇄 당시 재단의 소유자들은 강모씨 일가로 되어있다. 현재 수심원 건물은 굳게닫힌 입구 안으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거의 호러스팟을 연상케하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폐건물로 남아있다.

여기서의 수심원은 '마음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로 修心院이라 지었겠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재단장 이하 관리하던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가히 인면수심에 가까웠다.

최대 수용인원은 얼추 3자릿수 좀 넘는 정도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00명도 넘게 있었던 것 같다고.

심각한 인권유린이 행해졌던 곳으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1992년과 1997년 사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고 1997년 보도된 이후 23년간 이어진 폭력의 현장은 폐쇄되었다.

입소의 형태는 '보호자'가 신고를 하면 관계자가 뭍에서 잡아오고 수갑을 채워서 끌고 오는 형식이었다.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아도 가족이 알아서 관계자에게 유도를 해주는 식이었다. 일례로 모 여성원생은 어렸을적 쑥을 뜯고 있었는데 막내오빠가 바람을 쐬자고 바닷가로 차를 태웠는데 배 타고 왔던 관계자에게 넘겨버린 경우도 있었다. 장애 등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멀쩡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끌려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원생들은 보통 시설 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지만, '수감자'라는 글씨가 씌여진 요상한 앞치마를 겉에 걸친 조잡한 작업복을 입고 유부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운영하던 염전노동이나 농사, 각종 마을 잡역에 보조인력으로 동원되며 섬노예 수준으로 부려먹힌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시설은 열악했으며 조잡한 식사에 수년간 빨지도 않았던 담요 및 기자재들, 칸막이도 없던 화장실에서는 휴지조차 볼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서 목욕물이랍시고 그걸로 씻게 했으며 식수제공도 바닷물로 대충 했을 정도다. 이러니 관계자에 의한 구타도 일상적이었으며, 당시 보도자료에는 작업을 나가지 않았다고 몇 개월 동안 수감자끼리 수갑으로 묶어놓거나 학대로 인해 발가락이 없어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동료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48일간 독방에 구금되었던 故 김삼식씨였다. 당시 나온 몰골만 해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학대한 연합군 전쟁포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비참한 수준의 몰골이었다.

1997년 방송에서 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의사와 동행취재를 갔던 이성재 변호사(당시 국회의원)에 따르면 거의 동물 사육장 수준으로 비참했었다고 하며 90년대 정신질환자 인권에 대한 인식수준을 고려하면 육지에서도 이러한 시설이 많았었는데 심지어 바다에까지도 가두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내가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며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폐쇄 후 방송에서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시설 관계자 및 재단장이 때릴 힘을 아낀다는 이유로 원생이 다른 원생들을 때려 죽이게 한 살인교사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 3차 방영분에서는 이러한 살인교사를 저질렀었다고 고백하는 원생 정모씨(6개월간 수용. 1986년 탈출)가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이런 각종 구타살해는 정모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람 죽는 것이 일상이에요 진짜"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탈출하려는 사람들 혹은 탈출하려다 사망한 사람도 속출했었다. 수영한 경우도 있고 창살의 틈사이로 나간 사람도 있고, 수영이 안되는 어떤 사람은 커다란 스티로폼에 몸을 묶어서 바닷물에 몸을 띄운뒤 바닷물 흐름에 맡기는 식으로 탈출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들은 보통 거주민들이 막섬이라 부르는 인근 섬의 야산에 암매장 되었는데, 하필이면 이게 물때가 될 때에만 걸어서 당도할수 있는 곳이었다. 인근 보령시의 무창포해수욕장 명소인 석대도(일명 모세의 기적)와 비슷한 원리.

방송당시 섬 주민들은 말을 아꼈다. 사실상 작은 사회 수준으로 묵인된 것인지 몰라도 거의 시설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에서 어느 정도 말이 통한(?) 섬에서 수십년 넘게 산 할머니도 보통은 "집에서 난동부리는 놈 잡아다 쇠고랑 채워서 데리고 반 죽여놔서 집에서 하던 버릇을 못하게 되고 멀쩡해지니 우리같은 마을사람과 말도 통하고 일도 잘한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저 황소처럼 일하는 외부 잡역부들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연민은 있었는지 그들이 학대당하고 맞아 죽는 모습에서는 "불쌍하지, 무서워" 라면서 꽤나 전율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1992년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고발해오다가 1997년(송영재 PD 시절), 절치부심하고 다시 대대적 보도를 한 게 결실을 맺었다. 그 순간에도 원장 강모씨는 다른 범죄자들이 으레 그렇듯 카메라맨을 제지하며 욕지기로 저항했지만 당년 보도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지 당시 정부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즉각 폐쇄조치를 발령해서 시설 자체는 바로 문을 닫았다. IMF에 대한 사회공포 분위기나 대선 때문에 다소 묻히긴 했지만 공권력에서 조치를 내릴 정도면 이 보도의 결실로 인한 파동이 그때까지만 해도 헛되지 않아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갑작스레 폐쇄조치를 받은 영향인지 관계자들에게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권력의 심판으로 넘어갔다. 당시 수용되던 원생들중 상당수는 긴급 탈출조치를 받았다.

이때 일부 유골도 어느정도 발굴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치가 얼마나 신속했냐면 지금도 폐허에서 미처 은폐하지 못한 관리장부들이 굴러다닐 정도였다. 이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3차 보도시 이후 탈출한 원생들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장 강모씨와 측근, 이를 묵인해 온 지역 공무원 등에 대한 실제 처벌은 겨우 징역 1년 6개월형이 고작일 정도로 솜방망이에 그쳤으며 새롭게 드러난 범죄 사실에 따라 다시 죄를 묻는다고 해도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과인 살인 및 살인교사에 대한 혐의에 관한 처벌이 전혀 없었다. 강아무개는 출소후 그것이 알고싶다 3차 취재에 따르면 어느 시골에 은거중인 모습으로 나왔으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피해자들의 살인교사 증언에 대해서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좋게 이야기할 뿐" "미친놈들이지, 미친놈을 미친놈들이라 하는거고 다 똑같은 놈이고 나도 미친놈 아닙니까?" "나도 인생 버렸는데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원생들의 인생을 책임지라니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식의 자신도 이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식의 양비론 섞인 변명으로 일관했다. 지자체 사회복지부서 관계자에게 인터뷰해도 어쨌든 폐쇄되면서 다 끝난 일인데 좋은 일도 아닌 것을 다시 들추려고 하느냐면서 그냥 잊혀 지나갈 해프닝정도로만 인식한다. 




일단 원생들을 탈출시키기는 했는데, 당시 동행했던 이 변호사와 김 정신과의가 의논한 바에 따르면 이유 없이 갇힌 사람들만이라도 즉각 석방하는 것까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중 상당수는 재사회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탈출한 이들은 임시 거류지에 있다가 그중 몇몇은 다시 충청도 등의 여러 지역 정신질환 수용시설에 분산 인계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거기에 제대로 인계되지 못하거나 오래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쉼터 등을 전전하다가 대다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자살, 사망, 병사, 고독사,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하 그것이 알고싶다 2016년 방영분에 보도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 뒤의 †표시는 사망한 원생들.)

- 철장틈으로 탈출한 신모씨† - 수용기간 8년. 형제/가족들과 싸우다 알코올 중독자라는 이유로 수용된 것으로 추정. 딸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2016년 그가 살던 동네는 많이 바뀌었는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36년간 토박이었다는 이발사조차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다 간신히 그의 행적을 확인한 곳이 교회 쉼터였으며 그 쉼터에는 2002년에 반년간 있었다 무단 퇴소를 했다고 한다. 이후 신씨가 그의 친척집에 잠깐 머물렀던 탓에 친척과 연락이 닿게 되었는데 그 친척의 말에 따르면 나오자마자 오갈 데도 없었고 자신의 집에서 체류하다가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전전하다 쪽방(추정)에서 술 먹다가 사망한 것 같다며 그의 사망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심지어 친척의 말에 따르면 그가 찾고자 하는 마지막으로 의지하려 했었던 딸조차도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괴로워 했다고 한다.


- 김삼식† - 앞서 나왔던 48일간 독방에 수감되었던 사람이다. 집안 자체는 제법 부유했지만 돈의 개념이 없었고, 유산 상속 문제로 인해 작은 누나가 주모해서 마침 그가 앓던 간질을 빌미로 잡아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에 나오고 탈출했음에도 가족들이 찾지 않았으며, 자신을 집어넣은 누나에 대해 큰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흔적이 발견된 곳은 역시나 교회 쉼터. 출소 직후 갈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강도단에 가담하고 그 강도단에서 망을 보는 위치로 있었다가 검거되어서 7년간 재소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 교회 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목사를 만나 감회되어 어느 정도는 살 수 있었지만, 수심원에서 당한 폭행으로 인한 PTSD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로 계속 살았던 것과 누나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제초제를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래도 죽어가는 동안 결국은 큰누나를 만나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를 했다고. 당시 탈출하던 순간 지옥에서 천국 가는 느낌이며 임시계류지에서 먹은 김치 맛이 꿀맛이라고 한 모습을 대비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 김모씨† - 그의 형이 죽었다고, 죽은지 한참 되었다고 증언한다.



- 이모씨† - 여성. 수용이전만해도 한 남성과 결혼을 앞둔 상태였는데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그녀의 다른 자매들이 이런저런 빌미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남편(당시 仮)은 수용당한 이씨를 꺼내려고 했으나 보호자가 아니면 꺼낼 수도 없다는 조항 때문에, 게다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상태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고 한다. 그나마 탈출한 뒤에는 계속 동거했었지만 정식 혼인신고는 그녀가 사망하기 1년 전에서야 뒤늦게 했다고 한다. 사망시기는 2015년 8월로 비교적 최근이었다.


이 외에도 인명장부를 토대로 관련 관공서 등에 연락해 보니까 사망사실이 접수되었거나, 혹은 전산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생사 여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취재팀이 발굴한 문서의 406명 중 1997년 기준으로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청년 수용자 75명을 탈출 조치한 후 행방을 찾았지만 그중 사망자가 16명, 행방불명이 27명으로 집계되면서 그 당시의 젊은이들 중 절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상술했듯이 충청 지역의 여러 관련시설(정신질환자 복지시설, 요양원, 노인요양병원 등)에 분산 인계되어서 시설에 장기 수용되고 있다. 물론 유부도와 비교하면 훨씬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문제는 장애나 PTSD 증상이 어느 정도 나아져 사회에 돌아가려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보여도, 형제/자매/자식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포기각서까지 쓰면서 요양원에 맡겨버린 뒤 나 몰라라 하며 아예 찾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이와 관련해 전화하면 왜 전화했느냐고 면박을 주는 등 등 여전히 무시해서 시설 안에서만 계속 머물고 있다. 비참하게 죽은 이들보다는 그나마 나으나 이들도 안습하기 그지없다.

- 김모씨(2) - 2016년 방영분 초반에 나오는 할머니다. 이에 대해서는 상술했다. 당시 풀려난 후 다른 22명과 함께 특정한 요양원에 입소했는데 그중 5명이 퇴원하였고 12명은 요양원 생활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 강모씨(2016 취재당시 62세) - 거의 수심원 초창기부터 20년넘게 수용되었고 인계되고난뒤 요양원에서도 20년 넘게 살고있다. 그렇게 사회에서 격리되는동안 그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과거 퇴원시켜달라고 어머니에게 면회를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되었다. 여담이지만 위의 원장이라는 작자와 비슷한 연배다.

여담으로 정신과 의사 김정일의 에세이인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재단에서 외딴 곳에 운영하며 몇몇은 정신병도 아닌 이유로 끌려온 원생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며 원생들이 탈출할수 없는 시설에 절망한다는 내용의 짧은 희곡 대본이 실려있는데, 책의 출판년도(1995년)를 감안하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