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와 일본제국의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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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일본제국의 청일전쟁


2017. 11. 14.

청일전쟁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까지 벌어진 청나라와 일본제국의 전쟁. 단, 교전 자체는 6월 23일에 이미 발생한 상태. 

일본제국이 청나라를 이긴 전쟁이다. 전쟁에서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군통수권자의 무조건적인 소극적 방침과 지휘 시스템의 부실함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

-당대의 만평. 조선이라는 물고기를 낚으려는 일본제국와 청나라의 낚시 경쟁 러시아 제국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어째선지 정작 주요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이유는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서 청나라의 병력을 빌려 제압하려는 조선 조정의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10년 전 청나라에게서 갑신정변의 치욕을 당해왔던 일본에게는 10년만에 설욕을 갚기도 했고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를 잡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으니, 결국 한반도에 주둔 중인 청나라의 군대와 교전한 것이었다.

발단

청나라는 양무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다시 동아시아 패권자의 위치를 되찾으려 했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조선 뿐 아니라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서 새로운 식민지화 시장으로 떠오르던 청의 이권과 영토 빼앗기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역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조선이었다. 청나라는 청불전쟁의 패배로 안마당 중 하나인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내준 상황에서 마지막 안마당인 조선까지 내주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일본도 조선을 집어삼켜 중국 대륙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해 일본의 세력을 잠시나마 축출한 상황이었고, 일본은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뜻밖의 변수가 일어나니 그것이 바로 동학란이었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조선군이 힘을 못 쓰고 패배하면서 진압에 난항을 겪자, 조선은 청나라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병했고 일본도 곧바로 톈진 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하지만 동학군은 외국 군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외세에 빌미를 줄 것을 두려워하여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해 버렸다.

전개

당연히 조선 정부는 일본과 청나라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시져?"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갑오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도인 한양을 장악하고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 (7월 23일)

오시마 혼성여단의 병력은 약 8천 명에 달했으나, 실제 동원병력은 1천 명도 안 되었다. 영추문을 돌파하는데 지연이 걸리면서 조선군과 일본군 간에 광화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경비병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 허나,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면서 전세가 결정되었다. 일본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고, 이에 겁을 먹은 고종은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경복궁 침탈의 소식을 들은 도성 외곽 병력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고 있었고, 경복궁 안에서도 조선군 병력들은 그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를 버리라는 고종의 왕명이 전달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 병사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해산하였다. 조선군이 무기를 버리면서 전투는 끝났고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한다. 이러한 조선군 무장의 질과 양에 일본군이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갑오개혁에 대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킴과 동시에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에 청나라에서의 독립 선언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은 대조선정책의 일환으로 4가지 계획안을 준비했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의 계획으로 각 계획의 기본 모토는 다음과 같다.

갑(甲)의 계획은 앞서 기술된 조선의 지식인들과 일본이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내세우던 동양평화론과 함께 조선의 자주성 이야기의 내용 그대로로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진정한 독립국으로 조선을 만들고 그 자주도 맡기며 일본도 간섭을 안 하고 타국의 간섭도 허용을 하지 않는 형태로 조선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을(乙)의 계획은 명의상의 독립국으로 공인하지만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그 독립에 부지하며 타국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한다는 계획이었다.

병(丙)의 계획은 조선 영토의 안전은 청일 양국이 담보한다는 청국과의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정(丁)의 계획은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청나라에 제의하여 조선을 유럽의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내용만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었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으로도 활용되었었다.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 외교대신의 조선이 영구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봤을 뿐만 아니라 민씨 척족 정권을 몰아낸다고 해도 다시 친청 내각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 허사가 된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전쟁 시에 일본이 얻는 문제들을 감안할 경우를 고려하여 을(乙)의 계획안을 기반으로 해서 차후 논의를 지속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을사조약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기초적 발향으로서 1894년 8월 17일 내각에서 결정되게 된다.

그리고 8월 26일 조선의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그를 일본에 돕고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1894년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나라와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천을 평양에 마옥곤의 의군 2천을 의주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청 비밀 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일본과 비밀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자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는다.

개전


전쟁의 진행 과정




풍도 해전, 성환 전투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정여창이 이끄는 청국의 북양함대와 이토 스케유키가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가 격돌한다. 아산만으로 병력을 수송하던 청국의 군함 제원, 광을과 수송선 조강, 고승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연합함대 제1유격대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됐으며 광을은 도망치다 좌초하고 만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 육지에서 성환 전투가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된다. 8월 1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곧이어 평양에서 격돌한다. 그전에 일본도 5사단을 원산에 3사단을 인천에 각각 파견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


조선군과 청군 포로들. 뒤쪽에 일본군도 보인다. 청군 병사들의 상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이 문서를 읽어보자.

조선 내에서 벌어진 평양성 전투는 청국 1만4천여 대 일본군 3만(섭지초의 보고, 일본측 자료는 1만7천)이 붙게 된다. 당시 일본군은 청군에 비하여 병력 수만 조금 많을 뿐, 물자와 장비는 턱없이 열세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기초적인 먹는 문제조차도 일본군은 당시에 정규 급식 분량의 물자가 보급이 안 된 상황에서 건반(乾飯)으로 연명하는 수준이었고 그 건반조차도 이틀치밖에 없었다. 탄약은 아예 예비 물자도 없어서 병사 개개인이 휴대한 탄약이 전부였다. 즉, 일본군은 잘해야 48시간 내의 전투 수행 밖에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개인화기조차도 일본군은 단발식 후장소총인 무라타 13/18년식 소총이 주력이었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연발소총인 22년식 소총은 당시에 근위사단과 4사단에만 지급되어 있어서 존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나이더 단발총이라는 구형 중의 구형으로 무장해 있는 지경이었고 야포도 소구경이 전부였다. 반면에 청군은 만리헬식 연발소총과 마우저 소총 그리고 개틀링에 75mm이상의 크루프식 중포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외형적인 장비의 차이는 컸다. 더욱이 청군은 조선을 확고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물자를 나름 옮겨놓았기 때문에 보급선이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떨어져 있었지만 물자는 일본군보다 사정이 나았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청군이 이홍장의 사병들인 북양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당시 과거 자신들의 전통적인 체제와 전술 및 복식과 결별하고 서양식의 체제를 도입운영하여 체계적이었던 반면에 청군은 무기 수준만 근대화되었을 뿐이지 지휘 조직부터 전술은 전부 구시대를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였다. 훈련와 군기체제도 일본군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청군은 범죄자나 비적 출신들 성격이 강한 사병 집단이라 군기가 개판이어서 평양 등의 주둔 지역에서 민가를 약탈하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러댔다.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철저하게 군기를 엄정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 기강면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9월 15일 새벽에 평양성 전투는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하여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체계적인 지휘체계 아래에서 작전을 하는 일본군과 다르게 지휘체계 자체부터가 엉망이자 지휘관인 섭지초도 패배주의적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돌아가있던 청군은 기습 공격에 우왕좌왕하면서 혼란 상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개인별로 전의를 상실하고 군기강이 무너져서 전열조차 유지를 못했다.


게다가 더 문제인 건 이홍장은 자신의 기반인 군사력을 잃을까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청장 좌보귀가 패사하자 가뜩이나 소극적인 섭지초가 이 명령을 따른다고 일본군에 항복 제의를 하면서 도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덕분에 24시간 동안의 교전은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교전 후 일본군은 180여 명의 전상자 뿐이었지만 청군은 공식적으로만 2000여 명의 전사자에 미확인된 도주한 전사자들은 그 2배에 이른다고 평가될 지경이었다. 일본군의 압승이었으나 일본군도 물자 부족으로 정말 아슬아슬하다 싶을 만큼 간당간당한 상황이었기에 청군을 북쪽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평양성 전투만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당장 공격 선봉으로 청군의 십자포화에 노출되어 있었던 일본군의 오시마 여단은 섭지초로부터 항복을 제의받았을 때 이미 여단이 보유한 탄약이 전부 소진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교전이 단 몇 시간만 길어졌어도 일본군도 청군처럼 퇴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는 이야기다.

황해 해전

9월 17일 황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11척의 군함이 출전하였고,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10척의 군함이 이에 맞섰다.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함대가 전체적으로 3000t 이상의 견실한 순양함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반면에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000t 내외의 작은 순양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일본 측은 기함 마츠시마마저 4000t대의 순양함급이었던 반면에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000t이 넘는 압도적인 배수량을 자랑했기에 개함 전투 능력은 청나라가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패퇴하였다. 5척의 군함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 반면에 일본 연합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나라는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의 수비만 하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나섰다. 육군의 경우에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의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때문에 휘하의 지휘관들은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청군의 부패가 심화되어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것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일본의 진격은 거칠 게 없었다. 일본은 먼저 발해만 방면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위해(웨이하이)와 여순(뤼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중국에서의 전투



요동 전투

야마가타 아리노부의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안동(단둥)으로 진격해 요동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하였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노토부락을 친 이래 일본 최초의 대륙 침공이었다. 오야마 이와오의 제2군은 화원구(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금주, 대련(다롄)을 공격하였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개평과 영구까지 일본군이 점령하며 요동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한다. 이때 일본군이 벌인 학살로 여순에선 단지 36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하였다.

위해 전투: 북양함대의 궤멸

1895년 1월 19일 일본군은 위해 공격에 나선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육군과 호응하여 해상에서 육지의 일본군에 포격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만의 입구가 봉쇄되며 만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일본군에 의해 궤멸당한다. 정여창은 휘하 외국인 장병들이 항복을 촉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해산시키고 음독자살한다. 정여창 휘하의 장교인 유보섬, 황응양도 이때 자결하였다. 일본군은 12척의 청국 함대를 나포하였으며 이중 1척은 정여창의 군인정신에 대해 예를 표하며 그의 유체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

한편 북양함대가 이렇게 궤멸당할 동안 남양함대는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으며 중립을 선언하는 병크까지 저질렀다. 북양함대는 회군계지만 남양함대는 상군계였기 때문. 물론 북양함대 역시 이전 청불전쟁 때 복건함대가 신나게 쳐발릴때 구경만 하는 병크를 함께 저질렀었다.

정전회담

청나라는 회군이 신나게 털리자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로 상군도 신나게 털렸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시랑 장음환과 호남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나라의 전권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는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의 목을 죄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수도 북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마침내 3월 30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정전회담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아래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대고(大沽, 다구), 천진(톈진), 산해관의 성지와 보루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청군의 군수품 일체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천진, 산해관간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정전기간 내의 일본 군비는 청국측이 부담한다.
정전 일시 및 양군의 경계선 등 세부사항은 중국이 전기 3항에 동의했을 때 다시 논의한다.

얼핏 살펴만 봐도 막대한 재정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청나라의 수도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심산까지 나타났으므로 이홍장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가혹! 가혹!”이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몇 차례 회담이 벌어지던 중 이홍장이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에게 사죄하며 무조건 정전하겠다며 태도를 바꾼다. 이홍장은 참의 이경방을 대리로 내세워 회담을 이어갔고 1895년 3월 30일에 먼저 6개 조항의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휴전 기간 동안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명확히 확인하였으며, 이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요동반도, 대만과 그 부속도서, 팽호열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재무장관 비테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벌였다.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하이난도 할양을 요구할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일본에서 그려진 승전 기념화.


영향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징후로 받아들였고 열강으로 진입하면서 5년후 의화단 운동에 개입하였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와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삼국간섭을 벌인 러시아와 서구 열강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훗날 러일전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또한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일본의 유신처럼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변법자강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법자강운동의 경험이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얻게 되니 사실상 청을 멸망으로 몰고 간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편전쟁 등 서양 세력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던 것에 재수없게 지나가던 미친 개에게 물린 일 정도로 여기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청일전쟁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네 문화권에서 별 볼일 없었던 변방의 섬나라, 속된 말로 한낱 꼬붕으로 생각했던 작은 종자들에게 어처구니없이 털리고, 앞마당 국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 개망신을 당하자, 비로소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는 엄청난 충격과 상실감을 주게 된다.

뒤이은 변법자강운동의 실패와 뒤이은 의화단 운동으로 외세의 열강들이 아편전쟁 때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 대륙을 짓밟아버리면서 중국 지식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 혁명운동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조선에 미친 영향

근본적으로 조선의 행태는 한심 그 자체였다. 자국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웃기지도 않는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한 민씨 정권은 자국 내에서의 일본군과 청군의 전투 자체를 부추기는것도 모잘라서 자국 영토에서 외국군끼리 전투가 벌어지는데 방임하는 사태까지 벌인다. 더욱이 김홍집 내각을 전쟁을 틈타 청일전쟁 와중에 묵사발을 내놨다. 심지어 평양성 전투 등 한반도 내에서의 청일 간의 지상전에 각각 조선군을 투입시키는 참담한 짓거리마저 일삼게 된다. 일본군에는 중앙군인 장위영(壯衛營)을 보내 지원하고 청군은 평양감사 민병석 휘하의 위수병(偉戌兵)들, 이른바 평양부 지방군 병력을 동원하여 지원하며 서로 총질까지 하게 했다. 외국군을 막아야 하는 조선군이 조선군끼리 총질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제정신인 국가라면 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도 조선은 청군을 일본군이 이기면서 조선에서 격퇴하는 것에 경악을 하게 된다. 조선이 얼마나 국제 정세와 정보에 어두웠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교훈의 사례였다.

한편, 조선은 일본의 속국화를 피할 수 없는 시점이었으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 친러 정책(인아거일)을 펼치기 시작했다. 을미사변도 이러한 친러 정책으로 불안해진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거친 후 조선에서 외세의 균형이 잠시 평행 상태에 이른 틈을 타 대한제국으로 개편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제국은 외교 부문에서 외세를 끌어들여서 사채 돌려막기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미국이 집안싸움 하느라 손 뗀 사이, 메이지 유신 등의 개혁을 한 일본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등등 속국들 잘라주면서까지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 독립을 유지한 태국 등도 외교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정 개혁은 시대에 따르지 못했고, 결국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과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이 깨져버리면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장 전력 비교만 봐도 무기에서만 청군이 우월했지, 청군은 훈련도와 조직 그리고 전술 및 군기가 매우 부적절했다. 특히나 군기 문제는 심각해서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을 상습적으로 자행하여 당시 청군을 조선인들은 이를 갈 정도였지만 일본군은 무기에서는 질이 청군보다 떨어지긴 했으나, 군기가 매우 엄격하였고 훈련도와 조직력에서 서구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구체제를 타파한 형태였다. 특히나 군기 문제는 청군과 매우 비교가 되었는데 일본군도 현지 징발을 통해서 인력을 차출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조선인들을 고용하는 방식을 택했을 정도였고,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지나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군기가 엄정했다고 기록해 놓았을 정도로 청군과 근본적으로 자질면에서 달랐다. 이러한 파악조차 당시 명성황후를 위시로 한 조선 조정의 민씨 정권은 아무것도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던 한심한 작태의 현실이었다.

사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답시고 조선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청군이라는 외세 출병을 결정하여 발단을 제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의 추태는 19세기 조선의 최악의 결과로 영향을 미치는데 첫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전에 임오군란만 하더라도 왕명으로 잘 위무하라는 명령을 씹을 정도로 막나가는 처사를 자행해 놓고 청군을 동원하여 진압+호위를 받는 추태마저 보인게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 정권의 막장이었으니 조선군이 조선 내에서 외국군이 대규모 전면전을 벌이는 상황을 막지 못하는 추태가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국 정치가 부패하고 나라가 힘이 없으면 외세의 강한 힘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타이완 민주국의 좌절

타이완 민주국의 국기 황호기(黃虎旗). 그러나 5개월밖에 쓰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