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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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의혹


2017. 7. 11.

2011년 9월 6일(화),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련자이면서, 대략 1년 6개월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당시 유력대선주자 박근혜 의원의 5촌 조카이자, 서로는 사촌지간이었던 박용철과 박용수가 같은 날 북한산에서 사망한 사건.

박용철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박용수는 박용철 사망 몇 시간 후 북한산에서 목을 매고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그런데 당시 매체들은 대선에 영향이 갈까봐 이 사건에 포커스를 맞춰주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은 석연찮은 의혹을 뒤로 하고 사건을 둘의 원한지간에 의한 살인과 자살로 종결시킨다.

그런데 이후 이 사건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려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탄압을 받고, 이 사건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은 행방불명이 되거나 의문사의 시체로 발견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1990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육영재단 소유권 때문에 크게 싸운다. 이때 육영재단은 이사장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 일가가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박지만, 박근령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언니랑 최태민 좀 떼어내달라고 탄원서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하여튼 이 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박근령은 친언니인 박근혜를 밀어내고 차기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육영재단은 부동산만 4조원 가치(2016년 시가 기준)를 지니고 있는 대형 재단으로 임대 수익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재단 운영이 폐쇄적이라 온갖 비리 의혹으로 점철되었던 탓에 수익금에 대한 루머가 무성했다. 한데 이런 현상은 박근혜가 물러나고 박근령이 취임한 후에도 딱히 해소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와중 2007년부터 그동안 힘을 합쳐왔던 박근령과 박지만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때문이었는데, 신동욱은 2007년 2월에 14살 연상의 박근령과 약혼을 하게 되고 1년 8개월 후인 2008년 10월에는 결혼한다. 그런데 약혼을 한 이때 쯤부터 박지만은 매형 신동욱이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독점할 것을 두려워했는지 박근령-신동욱 커플과 갈등을 빚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이 깊어지자 박근령과 박지만 양측에선 조직폭력배와 불법 용역회사 등을 동원한 폭력행사까지 서슴치 않게 되는데, 급기야 2007년 11월 28일에는 불량배 200여명이 동원된 대규모 폭력 사태까지 터진다. 그리고 이때 한센병자를 동원한 박지만 측은 기어코 육영재단을 장악하게 되고, 당시 이사장이던 작은 누나 박근령과 그녀의 측근들은 육영재단에서 모조리 쫓겨나게 된다.

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박지만의 최측근으로서 폭력 사태를 주도한 바 있는 인물이다. 박용철은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손자이자 국제전기기업 대표인 박재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삼남매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기 때문에 사망 당시 국적은 캐나다였다. 박용철은 2007년에 귀국하여 당시 17대 대선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박근혜의 경호원 역할을 하였는데, 이 때 박지만과도 손을 잡고 육영재단 문제에도 관여하였다.



2007년 7월 박용철은 박근혜캠프에서 중국 재경부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당시 박근령의 약혼남이자 백석문화대학교 겸임교수였던 신동욱과 중국 칭다오에 함께 갔다. 그런데 칭다오에서의 첫날 밤에 신동욱이 자기 신변이 위험하다면서 건물에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고 중국 공안에게 신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육영재단 폭력사건에 개입하여 박근령 이사장을 쫓아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에서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신동욱은 2년 반 뒤인 2010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홈페이지에 “박지만이 박용철을 시켜 나를 살해하려 했다. 육영재단 강탈 사건에서 박지만은 허수아비 역할이었고 배후는 박근혜의 주변 사람들이다.”라는 주장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이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자 홈페이지 주인이던 박근혜는 하나뿐인 제부를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다.

재판 과정에서 신동욱이 주장한 청부 살인 시도 건은 인정되지만 박지만과의 연관성은 부정되었다. 이 소송에 증인으로 추석한 박용철은 박지만이 이 사건과 무관하고, 박지만의 측근인 정 씨가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0년 9월 1일, 재판 과정에서 박용철이 자신이 한 증언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증인으로 나온 육영재단 전 법무실 부장 이 모씨가 “박지만이 박용철에게 신동욱을 제거하라고 지시한 육성 녹음이 있고 통장으로 돈을 부쳐 준 증빙이 있다.”라는 얘기를 박용철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용철도 이를 긍정하면서 “EG그룹 회장 박지만의 비서인 실장 정용희가 내게 회장 박지만의 뜻이라고 말한 육성을 휴대전화 단말기에 녹음해 놨다.”라고 증언하였다.


박용철의 증언 이후 2011년 8월 신동욱은 처남이 자신의 살해기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여 법정 구속되었는데, 이에 신동욱 측 변호인은 2011년 9월 27일로 예정된 변론에 박용철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박용철이 9월 27일에 증언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론을 20여일 앞둔 2011년 9월 6일, 중요한 증언을 하기로 했던 박용철이 북한산 국립공원 사무소 수유분소 앞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동욱은 결국 이 소송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박용철이 이처럼 진술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 전에 숨졌으므로 자세한 부분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박용철은 자신의 주도로 육영재단에서 박근령 세력을 축출한 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에 잠시 임명되었으나 이내 교체되었고, 이후 박지만 세력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당시 박용철의 지인들과 범죄 전문가들은 박지만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은 박용철이 박지만을 압박하려고 진술을 번복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수사결과

2011년 9월 6일 새벽 1시경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 근처에서 박용철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박용철은 자신의 차 근처에 쓰러져 있었는데, 시체는 얼굴과 배가 칼날에 수십 차례 난자당하고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칼날로 복부를 찌르고 손목을 비틀면서 후벼 판 흔적을 보아, 범인은 살인에 상당한 지식이 있으며 경험도 풍부한 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박용철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뒤에도 범인은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장도리로 박용철의 두개골을 세 차례 강력히 가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박용철의 시체가 발견된지 4시간 후인 새벽 5시경, 박용철의 사촌형인 박용수란 인물이 박용철 살해 현장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용암문 근처의 산길에서 목이 매달린 채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신의 어깨에는 수건이 덮여 있었다. 박용수도 박무희의 손자로서 동양육운 회장 박재호의 아들이였다. 즉, 두 사람은 친사촌 사이다.


경찰은 누가 봐도 평범해보이지 않는 이런 사건에 대해, 수사를 시작한지 겨우 5일만에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하고서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에 따르면 박용철이 박용수에게 1억을 빌린 적이 있는데 박용철이 돈을 갚지 않고 있었으며, 사건 당일 박용수가 범행 도구를 미리 사놓은 점, 유서를 작성한 점, 범행 전 박용철씨를 만취시키고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던 점(부검 결과 박용철은 혈중 알코올농도 0.196%, 박용수씨는 0.01% 미만), 박용철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박용철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경찰이 발표한 수사 내용은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 힘들며 사건을 어떻게든 서둘러 매듭지으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경찰 발표가 나온 후 본격적으로 각종 의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19일 경찰청장 이철성은 "수사에 대한 외압은 없었으며 의혹만으로 재수사를 할 수는 없다" 라고 못박았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2017년 1월 9일 오후 2시 박근혜 대통령의 제부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신동욱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조서 하나와 이 사건 관련한 조서 하나를 썼는데, 특검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수사로 원체 바쁘게 돌아가다 종료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관련해 더 이상 유의미한 진전이 이뤄지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에 비공개 수사기록을 피해자 유가족에게 곧 공개된다.

의혹

유족에 의하면 박용철과 박용수는 사이가 좋았고 서로 원한도 없었다고 한다. 사건 전일 박용철, 박용수와 함께 술을 마셨던 황 씨의 증언으로도 당시 술자리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박용수가 박용철의 찜질방 운영비를 빌려준 일로 사촌 형제 사이에 문제가 생겨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은 박용철이 박용수에게 돈을 빌렸다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박용철의 지인(前 육영재단 임원)도 박용수가 박용철에게 1억이나 빌려줄 여유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체구나 성격을 봐도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박용철은 105킬로그램의 거구에 유도를 오랫동안 했고 폭력 전과가 6개나 있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이며, 평소에 술도 한번 마실때 많이 마시는 편으로 주변에 유명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박용수는 167센티미터의 키에 70킬로그램이 조금 넘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남자치고 다소 왜소한 체구에 성격도 얌전한 편인 박용수가 자신의 육체를 압도하고 성질까지 괄괄한 사촌동생 박용철을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는 점도 이상하거니와, 박용철의 시체에 난 ㄱ 자와 V 자로 꺾여 있는 상해 흔적은 도무지 평범한 사람이 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가족관계를 제하고 보더라도, 살면서 주먹질도 별로 안 해본 50대 일반인이 술에 취한 50대 조폭을 본인이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압도하며, 칼로 마구 찌르고 둔기로 머리도 쳐 죽였다는 게 결론인 것이라 납득하기가 어렵다.



박용수가 노트 한 장을 찢어 남긴 유서도 매우 이상했다. 자신의 시체를 절대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자살한 사람의 유서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많이 이상하다. 국과수에서 이 유서가 박용수의 필적이 맞는지 조사했는데 확인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기자 주진우가 사설 검증원에 의뢰한 결과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서로 같은 필체는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그 종이글씨를 박용수의 유서로 단정해서 모든 걸 빨리 묻어 버리려는 느낌이 짙었다.

박용수가 남겼다고 하는 유서(왼쪽)와 생전에 그가 쓴 글씨(오른쪽)


박용수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위에서 캡슐이 녹지 않은 변비약이 나왔다. 몸에 알약이 들어가면 30분이면 녹는데, 알약이 그대로 남았다는 것은 자살하기 30분 전에 먹었다는 의미이다. 사촌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자살하기 불과 30분 전에 장운동을 활발히 해주는 약을 먹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자살을 한 장소도 이상하다. 정말 사촌동생을 죽이고 죄책감과 당혹스러움에 자살을 결심했다면, 사촌동생을 죽인 그 자리나 근처, 혹은 자기집처럼 평소 익숙한 곳으로 가서 자살하는 게 자연스럽다. 한밤중에 전등 하나 없는 산으로 가서 컴컴한 어둠속에서 몇 시간이나 등산한 후 자살한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 더군다나 그가 산행을 했다고 알려진 길은 이정표나 불빛을 내는 어떠한 것도 없어서 인근 주민들은 대낮에도 기피했던 길이라고 한다.



박용철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수면제 성분(졸피뎀과 디아제핀)이 다량 검출되었다. 즉 박용철은 수면제로 항거 불능인 상태에서 칼과 장도리 등으로 가격당해 죽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졸피뎀과 디아제핀은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의사의 처방이 없으면 구매가 불가능한데, 두 사람은 의사 처방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약을 술과 함께 먹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 한편 박용수의 시체에서도 소량의 졸피뎀이 검출되었다.




박용수의 시체에는 목과 팔 무릎 곳곳에 긁힌 상처가 있는데 목을 매달기 전에 누군가와 몸싸움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목을 매달고 죽은 박용수의 시체는 큰 타월이 덮여 있었다는 점도 이상했다.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 몸을 가린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박용수의 가방에서 발견된 칼에는 박용철의 혈흔이나 박용수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 만일 박용수가 범인이라면, 사촌동생을 죽이고 자살까지 결심한 마당에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문을 깨끗이 지워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피살 사건 현장에서 60미터 떨어진 개천에서 발견된 다른 칼에는 박용철의 혈흔이 검출되었으나 박용수의 지문은 없었다.



박용수의 가방 자체도 의심대상이다. 박용수는 평소에 가방을 가지고 다닐 경우 무조건 본인이 아끼는 고가의 특정 외제 백팩 하나만 매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이 어떤 가방인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용철 살해사건 당시 가방은 백팩도 아닌 손가방이고 주변인들이 박용수가 가지고 다닌걸 한번도 본 적도 없는 가방이다.



박용수와 박용철이 죽기전 술을 마신 장소인 강남의 '스텝바'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항목에 나오는 신동욱 관련 재판에서 유력한 증거인 박용철의 휴대전화기가 피살 사건 현장에서 사라졌다. 박지만의 살인 교사가 녹음됐다는 바로 그 휴대전화기가 사라진 것이다.



2016년 12월 17일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경찰의 부실 수사와 함께 새로운 의혹이 드러났다.

박용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용수는 죽기 얼마 전 치과에서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으며 시신 옆에서 발견된 가방이 박용수가 평소에 들고 다니던 가방이 아니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사건 종결 후 1개월여만에 이미 깨끗이 치워진 박용수의 여관방에서 갑자기 흉기를 구입한 곳의 카드 영수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이 주장하는 흉기의 구입처에 문의한 결과 실제로 박용수가 이 곳에서 흉기를 구입한 것이 아니라 단지 경찰이 범행에 사용되었던 흉기와 같은 제품을 파는지 여부만 확인하고 갔다고 한다.

유서에 연락처로 적혀있던 매형에게 인터뷰한 결과 오랜기간동안 전혀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매형의 연락처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2007년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수사에 개입했던 성동경찰서장은 이만희였고, 박용철 살해사건을 담당했던 강북경찰서장은 김영일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이만희는 경북 영천,청도에서 당선되었으나 김영일은 전북 익산에서 낙마하였다. 현재 이만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서 증인과 짜고 위증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11년 9월 6일 발생한 박용철 살인사건의 관할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의 검사장 이득홍 전 서울고검장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담박’의 대표변호사 중 하나이며 우병우 전 수석과 사촌동서지간이다.



주변 인물의 행방불명과 의문사

박용철의 경호원이었던 황아무개는 출소 직후 컵라면을 먹다가 체해서 죽었다고 한다.

2017년 1월 1일 박지만의 수행비서가 숨진채 발견되었다. 죽은 주아무개라는 자는 박지만의 EG에서 18년 동안 근무하였으며, 비서실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에서는 1월 2일 자살, 타살 여부를 밝히기 위해 주아무개의 시신을 부검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아무개의 죽음에 대해 주아무개가 이 사건에 관련이 있어서, 혹은 주아무개가 이 사건에 대해 박지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 했기 때문에 살해 된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것이 알고싶다 측에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인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경찰청장 이철성은 정밀부검을 하면 보름이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성급히 지금까지 나온 부검 결과론 타살 흔적은 보이지 않고 주아무개의 사인은 허혈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에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하는 것 아니냔 의혹을 받았다.

신동욱은 자신의 트위터에 “인연이 있는 박용철, 박용수, 이춘상, 황XX, 허XX, 주XX 등 계속해서 미스테리한 주검이 발견됐다”며 “죄 없는 사람들 그만 희생시키고 내 목숨을 가져가라”는 글을 올렸다.국민일보 또 4일에는 “저와 관련된 사건 속 등장인물이 4년 동안 6명이 떠났다”고 주장했다.

주진우의 말에 따르면 이 주아무개라는 자는 죽은 박용철, 정용희라는 자와 함께 박근혜 주변에서 일을 봤었던 세 사람 중 하나로, 박용철 밑에서 활동을 했었고, 신동욱 관련 재판에 나와서 박용철, 박지만을 위해 증언을 했었던 핵심 관계자 라고 한다. 또한 박지만 밑에서 궂은 일은 다 했던 사람으로, 박용철 사망 당일에도 박지만과 동선이 겹친, 다시 말해서 박지만과 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아무개와 박지만의 사이가 틀어졌고, 정용희도 현재는 박지만과 사이가 소원한 상태인데, 아울러 주아무개와 정용희의 사이도 틀어진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주아무개의 죽음이 알려진 2017년 1월 1일 주진우와 주진우의 가족을 향해 어떤 자동차가 돌진을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아무개가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의 ‘박근혜-박지만 명예훼손 재판’에 출석해 증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김용민의 브리핑(1월 3일자) 인터뷰에서는 최순실이 노승일에게 "너 그러다 죽어. 나 무서운 사람이야."라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두언은 1월 4일 방영된 강적들에 출연해서, 육영재단 사태 때 박근령측에서 도운 숭모회 회원 두 명이 '차치기'와 '퍽치기'로 죽었다고 말했다.


최재석은 색다른 가설도 내놓았는데, 바로 아버지 최태민의 죽음이 이 모든 의문사의 시발점이라는 것. 또 자신도 최순실에게 고용된 불량배들에게 협박당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주진우-김어준 허위사실 유포 재판

이 사건은 발생 직후 후속 보도가 거의 없어 그저 4촌간의 금전관계에 의한 원한살인사건 정도로 묻힐 뻔 했으나, 김어준과 주진우는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 8일 자신들이 진행하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봉주 24회에서 위에서 제기된 의혹들을 최초로 제기하였다. 2011년 11월 이미 박지만측은 주진우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바 있는데, 이는 주진우가 한 출판 기념회에서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가서 독일 대통령을 만난 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박지만은 나꼼수에서 제기한 의혹까지 합해서 다시 2012년 12월 김어준-주진우를 고소하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3달만인 2013년 5월 14일, 검찰은 박지만이 고소한 내용으로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에다가 대통령 선거법 위반을 추가하여 주진우를 체포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시켰다. 검찰은 법원에 주진우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으나 법원은 영장을 기각하였고, 주진우는 14시간만에 풀려나왔다. 언론인을 이런 혐의로 구속하는 것은 1987년 이래 드문일로, 독재정권에서나 벌어진 일이었는데, 검찰은 박근혜에게 충성심을 보이려고 했는지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

결국 2013년 10월 김어준과 주진우에 대한 1심재판에서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배심원 평결)의 의견을 들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검찰은 "대선국면에서 박근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사건을 왜곡하였다"라고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위에서 나열된 여러 의혹들을 볼 때, 주진우의 의혹제기가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무죄판결에 불복한 검찰은 상고하였지만, 2015년 1월, 2심에도 마찬가지로 무죄를 판결하였다. 검찰은 다시 이를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2016년 12월 현재 아직도 계류중이다. 


한편 주진우와 김어준은 2014년 8월, 이 사건에 대한 결정적 제보를 받고 증언을 청취하러 두바이에 간 바 있다. 김어준은 나꼼수에서는 항상 "쫄지마"라고 말했지만 이 사건은 워낙 관련자들이 위해를 당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팀을 조직해 신변을 보호하려 했다고 한다. 이 팀은 김어준과 주진우를 비롯해 국회의원 2명(정청래, 진선미), 변호사 2명(민변회장 한택근, 김용민), SBS의 배정훈 PD, 한겨레의 탐사보도팀 기자, 딴지 벙커1 PD 등 총 9명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두바이에 3박 4일간 원정하여 결정적인 제보를 녹화했다고 한다.

이 제보는 바로 2016년 12월 17일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일부가 방영되었다. 워낙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증언을 녹취하고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박근혜가 완전히 통치력을 상실할 때까지 2년간이나 공개하지 못하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