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오른팔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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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오른팔 이후락


2017. 7. 6.

1924년 경상남도 울산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사람이었으나, 5.16 군사정변 직후 협조를 요청받고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량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최측근이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허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선 제갈조조는 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사실 북한 가서 김일성 만난 거 빼곤 딱히 특별한 업적도 없는지라.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글자 그대로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로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자 비서실장에서 경질되어 1969년 10월 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 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그리고 주 일본 대사로 있으면서 일본 현지에서 초밥을 냉동포장하여 비행기편으로 박정희에게 보낼 정도였다. 이는 황병태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1970년 12월에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유신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중앙정보부장 재임중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의 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냈다.
좌측 끝이 이후락. 제일 오른쪽이야 뭐 다들 알고 있듯이... 참고로 뒤쪽에 작게 보이는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대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을 함께 하며 1.21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발언도 나왔다.

이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전쟁이 없었던들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 라고 대답했고 김일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대한민국 법무부장관 등과 함께 유신 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1973년 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언제 숙청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이게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다만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일본 대사인 권철현이 김대중을 납치한 후에 각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후에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 전 신민당 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울산시-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흘리고 떡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합리화해 대중들을 벙찌게 하기도.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거니 그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 따질 때 흔히 나오는 강남의 한보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80년대 초반 당시 2천만 원대. 지금 10억 원대 매매가를 자랑한다. 그것으로 계산하면 현재 가치로 대략 9700억 원.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2003년에는 생리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9년 10월 31일 사망. 그가 모시던 박정희와 동료들이라 할 수 있는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 등이 각각 총살 및 사형, 석연치 않은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간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름대로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