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었던 비운의 대통령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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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없었던 비운의 대통령 최규하


2017. 6. 11.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박정희 정부 당시 제12대 국무총리였으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여 대통령직이 궐위되자 그 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신군부의 반란으로 사실상 축출됨에 따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


호는 현석(玄石), 자는 서옥(瑞玉)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한 명칭은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 강원도원주군 출신.

10.26 사건이전 가문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와 일본 동경고등사범 영문과, 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졸업하였다. 대동학원이 당시 만주국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졸업 후 만주국 관리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처럼 친일의혹이 있지만, 딱히 친일 행적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특이한 점이라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충성맹세 행위가 포착되는 등 적극적 친일의 기록이 남아있는 박정희의 경우에는 그 지지세력이 계속해서 은폐를 시도하고 있음에도 "친일파이자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딱히 대중의 관심사가 아닌 때문인지 최규하는 누가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게 아닌데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눈에 불을 켜고 친일행적을 찾으려 들었는데도 나온게 없어서 <친일인명사전>에 일단 이름이 올라가 있긴 해도 관련 서술은 좀 많이 빈약한 편. 

"만주 대동학원이 일제가 세운 관료양성기관이니까 거기에 입학 및 졸업 했다면 친일파가 맞다"라는 서술 뿐인데다가, 친일파였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관료였으니 소위 친일파 '만주 인맥'이 분명하다는게 주요 논지인데, 오히려 박정희 집권 초창기에 행정관료인 최규하가 별로 안중에 없었다는 점을 들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장하는 '만주 인맥'이라는 것의 객관성은 해당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논란 중. . 

최규하가 사망했을 때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이 쓴 평, 최규하, 일제 관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가 최규하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시각을 대변하는데... 여기서도 대동학원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사실 구체적 내용이 아무 것도 없고 완전 엉뚱한 '나쁜 놈들은 일제 관료출신들의 후예다'라는 생뚱맞은 결론을 내는게 좀...


추가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만주대동학원이 건설되는 30년대 중반이면 조선 땅에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지 한 세대가 되는 시점이고, 강제지배에 들어간지도 20년이 넘은 시점이라, 이미 당시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하뎌너 청년계층 중 '조선'이나 '대한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드물었다.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이 동네에 일본인 학교 있고, 일본말을 조선말과 같이 배우고, 일본 사람들과 교류하던 식이라... 

이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해당 분야 연구에서 더 이상 단순한 '친일' 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들고, 점차 '부일'이나 '협일'등, 차이점이 존재하는 개념들이 등장하여 세분화 되는 것을 통해 조명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30년대에 들어와서 '조선반도' 모든 조선인들이 강경한 독립정신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나름대로 시대적 상황에 모순과 울분을 느끼면서도 누구나 다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평범하게 순응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평범한 대중은 언제나 절대 다수라... 


그런 젊은이들의 경우 조선땅 안에서 총독부에 근무하거나 순사노릇 하거나 하는 고약한 짓은 하지 않더라도 일제가 제공하는 고등교육 받아 공부 열심히 하고 적당히 출세하여 관료봉급 받으며 차별도 좀 덜 당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순순히 창씨개명하고 조선 밖 만주국 같은 곳에서 중하급 행정관료, 사무직 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최규하는 적극적인 친일파도 아니었으나, 적극적으로 독립을 꿈꾸던 것도 아니었고, 당시 평균적인 수준에서 일제가 만든 세상에 그냥 적응하여 당시 조선출신들이 막노동 외에 할 수 있었던 일로 고등교육 받고 얌전히 관료일 하는 정도 부일파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꽤 있다. 물론, 민족문제연구소 등 강경한 민족주의 계통 연구단체에서는 친일파가 확실하다고 못박고 있긴 한데...증거는 커녕 뭔 중대한 의혹이나 악평조차 나오는게 없어서... 조선출신으로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들은 일제에 이용가치가 높기 때문에 거의 반드시 뭔가 문헌기록, 사진, 영상, 어록 등 형태로 친일을 입증하는 사료가 남아있기에 그런 사료 파내서 친일파 아닌 척 숨기려는 사람들 잡아내는데 귀신들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여전히 아무 것도 찾은게 없다. 

정치사에서는 별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최규하나 그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당시 인사들의 친일, 혹은 부일 문제는 해방 전 일제말기 시대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점이 꽤 많기 때문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방전, 일제말기 시대연구의 최근 동향을 꼭 참고해보도록 하자.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직하던 중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계획처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활동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어,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고 1959년에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박정희는 최규하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외무차관이란 이유로 싫어했으나 외무장관 이동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19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기용하였다가, 그 후 1967년 외무부 장관,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로 중용하였다. 전임자인 김종필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자 박정희가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관료출신 최규하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몇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다 공직생활을 마감할 운명이었는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다만 아무도 최규하가 6년의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러 다음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 


그러나 그 직후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허수아비였던 것. 만약 그에 맞서서 뭔가 해보려고 했다면 태평양 건너의 어느 대통령처럼, 한국 현대사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직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한번 더 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바로 헌법을 바꿔서 5공화국 유일무이의 대통령이 되었다.

사임 뒤에는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에 사망했다. 향년 88세.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비망록을 남겨 놓을 테니 참고하면 될 것이라고 했던 걸 보면 기록이 일기로 있긴 있던 모양이지만 끝내 공개되지는 않았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대통령이 안장된 경우는 1985년 설립 이래 최초이다.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은 홀로 묘역을 지킬듯 하다.


여담으로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도 노년까지 창고에서 손수 연탄을 집게로 날라 때운 연탄 보일러로 방을 덥혔다. 냉방 기계인 선풍기 또한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옛날 물건이었고, 에어컨 역시 장남이 미국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 제작했으며 그 달력에 빽빽히 매일매일의 일정을 기입했다. 볼펜 또한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한미회담에서 썼던 볼펜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하루는 꽃동네의 신부가 우연히 산삼을 얻어 최규하에게 선물했는데, 그 산삼을 돌려보내며 다른 불우한 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최규하를 비웃는 사람들일지언정 그의 개인적인 면모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긍정적 수식어로 많이 붙는 표현이 '선비'. 언론에서나 다른 정치인들이 최규하를 수식하는 단어로 '선비 대통령', '선비 정신을 갖춘 대통령' 이런 식으로 간간히 쓰였고, 장례 때도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선비의 표상"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었다. 이는 사실 그가 한학을 배우기도 했었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았던 걸 가리키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에서는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한 경향이 있고, 검소함이나 절제와 함께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부분인 '절개'나 '기개'라는 부분에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표현.

최규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권영민 전 독일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이나 신중함을 비꼬는 의미로 국민들이 "최 주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본인은 당연히 매우 불쾌해 했는데, 권 전 대사는 평소에 온화하던 최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회고했다. 

사실 '주사'라는 표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6급 공무원을 지칭하는 직급명이긴 하나, 지방직 공무원들의 경우 공무원끼리 서로, 또 민원인들이 공무원을 부를 때 적당히 사용할만한 경칭으로 'OOO주사(님)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특히 9급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할 경우, 승진 시험 없이 경력 차면 연공만으로 승진 가능한 직급이 대개 6급 주사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등에서 특별한 권한이나 재량 없이 지시와 규정대로 정해진 일이나 하다가 화난 민원인이라도 찾아오면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적당히 굽신거리는 중년, 또는 초로의 아저씨... 정도가 흔히 생각하는 '주사'의 이미지인 것. 말하자면 공무원의 초라하고 무기력한(더 나아가 무능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축된 표현이다.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최규하를 지칭하던 '최 주사' 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유부단함과 신중함만을 비꼰 것이 아니라 대통령씩이나 하면서 하는 일은 말단 공무원같다, 즉 자기 권한과 재량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는 못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고 서식 맞춰 서류나 써낸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 딱히 하는 일도 없다는 굉장히 심한 조롱이다. 그의 장점으로 꼽히는 검소함이나 자기절제 역시 이런 부정적인 평가와 얽혀서 '좀스럽고 째째하다'는 나쁜 의미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최규하 자신의 책임이고,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행적이긴 하지만 불같이 화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모욕적인 표현임은 분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