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불법 사조직 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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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불법 사조직 하나회


2017. 6. 9.

하나회는 대한민국 육군 내에 존재했던 불법 사조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여 육군사관학교 동기와 후배들이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10.26 사건로 정국이 혼란함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흔히 말하는 군부 중, 신군부라고 불리는 게 이쪽이다. 훗날 노태우 정부에서도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존속했다가, 민주 투사였던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숙청되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초창기부터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보직을 하나회 조직원들끼리 대물림하면서 군부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때문에 이때부터 이미 하나회 가입은 곧 출세와 같은 의미였다. 특히 당시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국군보안사령부와 육군특수전사령부는 하나회 출신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결국 보안사와 특전사는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는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이들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5공화국에서 6공화국에 이르는 시기가 되면 하나회 출신이 아니면 육군참모총장이나 기무사령관 같은 최고 요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됐을 정도.


하나회는 육군 장교, 그것도 정규 육사출신들만의 클럽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세력이 미약했던 대한민국 해군과 대한민국 공군, 같은 육군도 육군3사관학교 및 사관후보생, ROTC 장교들은 여기 출신 두 대통령 시기에 더욱 심한 박탈감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세간에 하나회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군 내의 사조직이 무슨 소리야?"라며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필자들의 경우가 그랬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군대란 조직 특성상 같은 연고지역 모임이 많다.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노태우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회는 사관학교시절 친목단체인 오성그룹 통칭 오성회에서 시작한다. 1951년 11기로 입학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생도시절 영남출신 생도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여기서 친목단체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오성그룹이다. 노태우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사관생도들의 별명인 추성과 지들이 염원하는 전과기록장군 계급장인 별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직원들에게 각각 별 성자를 붙여서 용성 전두환, 관성 노태우, 여성 김복동, 혜성 최성택, 웅성 박병하이렇게 5명의 조직원들에서 따와 오성회라고 불렀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그러나 박병하가 유급당해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이 후 다른 육사 11기에서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이 추가되어서 칠성회가 된다. 다만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오성회 결성부터 박병하가 아닌 백운택이 오성회소속이었다고 한다.

일단 선배들이 죽도록 싸우는데 후방에서 친목질이나 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조직원들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시기 5성회는 훗날 범죄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단순 친목조직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태우도 5성회가 공개적으로 어울려다니면서 다른 생도들이 우러러보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개활동은 믿을 수 있어도 다른 생도들이 부러워 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게 이 오성그룹이 그다지 부러워할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의 성적을 보면 대부분이 머리가 나뻐 공부 대신 운동장에서 4년동안 볼만 차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두환의 경우 단순히 육사에서 축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공부를 안해 성적이 나빴던게 아니라, 1951년 9월 육사 입학시험 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후보로 겨우 입학할 정도로 원래 머리가 나빴다. 그바람에 우수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번도 못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거의 꼴지라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이 낮게 부여 받고 다른 맴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미달로 유급당한다. 그나마 노태우가 (본인회고록의 주장에 따르면) 그중에서 나아서 1학년때는 200명중 10위권 이었지만 졸업할때는 67등까지 떨어져서 남들이 우러러 볼만큼 성적이 좋은 학생은 아니었고 때문인지 자기 회고록에서 생도시절 자랑거리를 럭비랑 똥군기를 무지 잘한것에 대해서만 쓰고 있다. 그렇다고 어디 잘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그런 친목단체에 불과했다.


칠성회는 일명 김태환회로도 불렸다. ""복동, 노""우, 전두""해서 김태환회이다. 그만큼 이 3명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특히 김복동과 전두환은 오성회 시절부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전두환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때문에 칠성회 혹은 일심회 초기 김복동이 잠깐 축출되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이 바로 하나회의 주범들로 얼마나 요직을 독점 했냐면, 1973년 1월 1일에 육사 11기 최초로 별을 단 것도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등 4명으로, 100% 하나회에서 다 해먹었다. 반면에 같은 육사 11기이자 하나회 창설멤버인 노정기는 영남출신으로 상징적으로 가입된 인물로 오성회라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고, 진급도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다.

이 오성그룹 혹은 7성회 인간들은 선민사상에 쩔어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사 11기 기수 문제다 이를 알려면 육사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1949년까지는(훗날 1~9기) 단기교육만 실시하던 사관학교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 2년간 교육과정을 정해서 교육생(훗날 10기)을 받았고 다음해인 195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정규 4년제 교육과정을 받는 교육생을 받아 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나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져서 육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아직 교육을 받던 49년 입학생과 50년 입학생은 채병덕의 명령으로 소총병으로 포천에 투입되었다.(김재홍, 軍(군) 어제와 오늘 30화, 『동아일보』, 1993년 7월 29일 p5) 하지만 곧 국방부는 전쟁중이라도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고 깨달았고 이후 아직 살아있던 50년 입학생들을 다시 찾아 육군 종합학교에서 단기 교육을 받게하는 한편 51년 10월에 31일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4년 교육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회 일당들이 입학한 교육생들이다.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때즘인 1955년 4월 27일에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그런데 전쟁중에 후방에서 탱자탱자 놀던 51년 입학생들은 이 조치에 지랄 반발했고 그 중 김성진과 위에서 언급한 오성그룹의 백운택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항의하려다 헌병대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같은 오성그룹의 노태우도 이 일을 두고 회고록에서 어려움과 배고품을 견디고 간신히 졸업했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얘네가 한끼 굶는 걸 걱정할때 육사 1~10기는 목숨 걱정부터 해야하는 참전군인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3년간 실전경험을 갖춘 군인들이었다. 이 행동은 미국같은 나라였으면 군인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매장당할 발언이었지만 51년 입학생중 유의진 한명만 퇴학조치되는 걸로 마무리 지어졌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p74~75)

그렇게 낮은 성적으로 졸업한 칠성회 인간들은 두목 전두환이 주동하여 5.16 군사정변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조직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자신의 전속 부관 손영길 대위와 함께 찾아온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에게 육사, 정확히는 총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극성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11기생 중 생도시절 성적이 좋았던 장교들이 모인 '청죽회'가 중심이였는데. 5.16 군사정변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요구할 때 당시 육사교수부에 배속된 청죽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평시에는 당연히 성적이 좋았던 청죽회가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것인데, 박정희 입장에서는 청죽회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전두환 같이 비청죽회 동문을 중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한 것, 

그리고 전두환 등은 박정희의 명령에 칠성회를 확장시켜서 육사 내부 영남파벌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일심회이다. 이 일심회가 바로 하나회의 초기 형태로, 기본은 칠성회를 기본으로 하는 육사 11기 영남 파벌과 육사 14기 영남파벌을 중심으로 결성된다. 


일심회의 뜻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특징은,
  • 정규 육사 출신을 매기수 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약 5% 수준인 10여명 내외로 하고,
  •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 하고
  • 가입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필요하고,
  •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하며,
  •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서는 인사정체가 심화되어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의무복무 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재기별로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가입은 군부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일심회는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역 출신, 성적 우수, 정치색이었다. 성적 우수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자의에 관계없이 거의 강제로 하나회에 가입되기도 했다. 장세동과 같은 非영남 출신으로 하나회에 가입된 인물들은 대개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하나회 회원들도 자기 동기 중에서 누가 하나회 회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영남 출신으로 하나회 회원들을 한정 시켰냐면, 하나회 결성당시인 1963년에는 쿠데타 당시 주체세력들인 함경도 출신인 정일권, 임동하, 박임항 및 평안도 출신인 장도영, 백선엽 및 경상도 출신 박정희간에 갈등이 표출된 해였기 때문이다. 1961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도 쿠데타 혐의로 구속 시키면서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 출신으로만 군내 사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핵심 인물]

이하의 하나회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정규 육사로 일컫는 11기 이후만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등 11기 이전 출신 인사들은 "신군부이자 하나회의 후원자"라고 하면 맞지만, 하나회 회원은 아니다.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

하나회 11기.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 체육관 대통령 당선.


9사단장 소장 노태우

하나회 11기. 대장 진급 후 예편하여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쳐 전두환 이후 대통령 당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됬을때 하나회는 분열되어 전두환계와 노태우계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이미 하나회의 2인자로 여겨졌던 노태우는 오랜 기간 동안 2인자로서 설움을 견뎌야 했다. 권력의 속성 상 2인자에겐 견제가 쏟아질 수 밖에 없었지만, 노태우는 그 것을 견뎌냈고 겉으로는 친구에게 충성을 다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충성과 우정을 확신하며 그에게 권력을 넘겼다. 그러나 그 노태우는 권력을 쥔 후 전두환계를 가차 없이 숙청했다. 



암투의 발단은 1987년 말 군인사에서 시작되었다. 집권 전 자신은 결코 중임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전두환은 막상 임기 말이 되자 퇴임 후에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으로서 노태우 위에서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퇴임 직전인 87년 12월, 전두환은 군 인사에서 군부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충복들을 깔아두었다. 정권을 이양하는 시기임에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군 인사를 행하며 향후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자신의 충복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1년 더 유임시킨 것을 시작으로 합참의장에 최세창, 3군사령관에 고명승, 기무사령관에 최평욱, 수방사령관에 김진영 등 자신이 키워온 하나회 내 전두환 직계들을 군부 핵심 요직에 깔아두었다. 수도권 군사령관인 3군사령관, 군을 감시하는 기무사령관, 수도를 지키는 수방사령관은 정권의 안전과 직결된 핵심 요직들이다. 거기다 쿠데타 시 병력 동원이 가장 유용한 특전사령관도 전두환계 민병돈이었으므로 쉽게 말해 마음만 먹으면 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정권을 넘겨주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날려버리려는 의도였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의도에 노태우는 분노했지만 속으로 분을 삭히며 일단 참았다. 노태우는 겉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았다가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하는 스타일이라는 평이 있다. 그 평대로 노태우는 시간을 기다린 후 전두환계 숙청에 나서 자신이 겪은 설움과 분노를 갚아주었다. 2인자로서 전두환에게 숱하게 갈굼받고 늘 고개 숙여 처신해 온 노태우였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 노태우는 대통령을 간선제 형식으로 물려받지 않았다. 비록 어부지리 당선이었고 전두환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직선제 당선이라 정권의 정당성이 있었다. 둘째, 전두환계를 숙청할 명분도 확보했다. 비록 어이없게 노태우가 당선되긴 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국민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 것은 이듬해 88년 4월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며 여소야대 국면으로 흐르게 되며 더욱 증폭된다.

88년 6월, 취임 후 첫 군 장성 인사에서 5공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명분으로 박희도를 참모총장에서 경질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1년 안에 합참의장 최세창, 특전사령관 민병돈, 기무사령관 최평욱, 수방사령관 김진영, 참모차장 권병식, 5군단장 정만길 등이 차례차례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예편했고 자리가 빈 요직들에 그 동안 소외되었던 자신의 직계 하나회 장교들을 깔아 두어 군을 장악했다.군 밖에서도 국민 여론이 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활용하여 장세동, 이학봉 등 전두환의 충복들을 구속시켰다. 전두환계는 반발했지만 국민 여론을 등에 업은 노태우에게 사정 없이 당했다. 17기 선두주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던 차기 육군참모총장 김진영은 불만을 드러내다 수방사령관이라는 실세 자리에서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쫓겨났다. 특전사령관에서 쫓겨나 육사 교장으로 갔던 민병돈은 육사 졸업식에서 임석해있던 노태우의 북방정책을 강하게 비난하고 경례마저 하지 않으며 엿먹이고 예편당했다. 15기 선두주자 고명승은 3군사령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영전 없이전역해야 했다. 16기 선두주자 최평욱 역시 좌천 후 예편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 자리는 노태우의 직계 군맥, 이른바 '9-9 인맥'들이 차지했다. 이진삼 같이 전두환 정권에서는 노태우에 대한 견제로 전두환 직계들에게 밀려왔던 그들은 급부상하여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9-9인맥은 非하나회, 非육사 출신들도 더러 있었지만 역시 주류는 하나회 내 노태우계 장교들이었다. 대장 4차 진급자임에도 참모총장을 차지한 15기 이진삼, 합참의장 16기 이필섭, 특전사령관과 1군사령관을 역임한 17기 이문석, 수방/기무/3군 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18기 구창회 기무사령관을 거쳐 1군사령관이 된 18기 조남풍, 수방사령관을 역임한 19기 김진선과 20기 안병호가 대표적인 9-9 인맥 내 하나회 장교들로 선두에 섰던 전두환계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고 대표적으로 노태우 직계 김진선이 지나치게 전두환계 하나회를 공격하다가 금족령까지 받은 일이 있다. 또한, 전두환계 수장인 국방부장관 이종구와 노태우계 수장인 참모총장 이진삼은 인사권 문제를 두고 서로를 비난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렇듯 하나로 똘똘 뭉쳐 대한민국을 장악한 사조직 하나회도 권력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자신들은 이른바 '구국의 결단'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는지, 왜 하나회를 조직하였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는 임기 말이 되자 본인도 뒷날이 걱정되었는지 전두환계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해 하나회를 단결시키려 한 것 같다. 자신이 좌천시킨 전두환계 핵심 김진영을 복권시켜 참모총장에 발탁했고 기무사령관에도 전두환계 서완수를 임명했다.

3당 합당 이후 노태우와 민정계는 김영삼을 대신하고 김대중에 대항할 만한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김영삼을 대선 후보로 선택했고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처럼 임기말 군인사로 수족들을 깔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 내 핵심 요직들을 하나회로 장악시켜논 상태였다. 노태우는 자신이 물러나더라도 군부는 하나회로 장악시켜 놓았으므로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김영삼이 설마 자신을 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간 역시 김영삼이 하나회 세력과 불편한 동거를 지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불도저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를 가리지 않고 하나회를 숙청했다.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및 해체]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의 숙군(肅軍)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영삼의 대통령 시절 다른 업적들(금융실명제 등)과 유사한 행보를 보여 준다. 기존 행정 조직이 아니라 철저히 측근들하고만 의논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깜짝쇼를 하듯이 터뜨리는 것이다.

하나회라는 조직이 극단적으로 반발할 경우 쿠데타 가능성까지 언급될 정도의 조직이었던 만큼, 하나회 숙청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습적인 방식이 더 알맞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천천히 물갈이하려다가 역으로 전두환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에 당한 전력도 있었으니.

1993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부터 하나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특히 국방부 장관으로 생각하고 있던 육사 15기 권영해 예비역 소장으로부터 하나회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이에 취임 후 청와대에서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철저히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짜게 되었다.

당시 김영삼의 비선 조직은 절친한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1군 사령부 방첩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거사 이틀전인 3월 6일에는 우선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등을 최종 점검하였다. 특히 대통령의 최측근이였던 박관용 비서실장이 하나회의 수장격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부산중학교 동기동창 출신의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문에 박관용이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에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을 언급한다고 하자 대통령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고만 했고, 여기에 일종의 청와대 빨대라고 할 수 있는 현역 장성인 김희상 국방비서관에게도 아무 상의를 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이들 둘에게 아무런 첩보가 없었고 김진영 육참총장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고 말했다. 

한편, 동년 3월 3일에는 육사 졸업식때 장성들 얼굴을 모르면 안된다는 이유로 소집된 육해공 3군 중장 이상이 참석한 3월의 보고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 없이 칭찬을 쏟아 그들을 안심 시켰다. 이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출처: 대통령기록관)

그리고 용산구 국방부 내부 주차장에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된다. 비하나회파가 뿌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단에 대해서 권영해 국방장관은 조사를 명령하는 것과 함께 김영삼에게 보고를 했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취임 11일째인 1993년 3월 8일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중 단 한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 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국방부 장관 권영해를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오라고 한 후 당일 독대했다.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김영삼이 묻자 권 장관은 "군대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영삼이 "아 그래요. 그럼 됐구만"이라고 말하더니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꾸려고 합니다"라고 선언했다.와우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김영삼과 권영해가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김진영과 기무사령관이었던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해임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각각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했다. 기무사령관 교체시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서완수 사령관이 해임된 뒤 김도윤 참모장이 취임하는데 원래 기무사령관은 중장이 보임한다.


그러나 너무 빨리 교체되는 바람에 진급시킬 시간이 없어 물러날 때까지 김도윤 기무사령관은 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중장이 보임된 건 다음 기무사령관에서였다. 여기까지 과정이 단 네 시간.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아닌 하나회 숙청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다음날인 3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그 유명한 "모두 깜짝 놀랬제" 발언을 하여 뒷날 화제가 되었다. 이어 "저쪽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거야"라고 하였고,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해 자리가 화기애애했다. 동아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군부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라는 충격을 넘어 경악하는 반응이 나왔다. 

재밌는 점은 김영삼 대통령의 명령을 하달받고 시행할 것을 공지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에 의해 잘리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이라는 것이다. 이 공지를 요약하자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김진영의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이를 들은 하나회 구성원들은 초기에는 그 대상을 하나회가 아닌 학군장교(ROTC) 그룹으로 여겼다.

1993년 4월 2일에는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가 육사 20기~36기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용산구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언론에서 나온 각종 하나회 명단은 이른바 '백승도 명단'에서 일부 이름과 기수 오류 같은 오타를 수정한 명단이다.

장성급까지의 하나회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대상으로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이 하나회 명단 살포와 그 후 명단 확인 소동 등이 일어나면서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까지 전부 드러나게 되었고, 이후 이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일로 육사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육사 19기 김형선 특전사령관까지 경질 후 교체되었다. 이 교체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특전사령관은 아예 포기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었고, 수방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곳저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한다. 물론 결과는 사이좋게 모가지. 이런 교체 의도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알게 된 건 겨우 발표 하루 전이었을 정도로 이러한 진행은 김영삼과 측근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4월 8일에는 1, 3 야전군 사령관과 제2작전사령관이 교체되었고, 일주일 후인 4월 15일에는 군단장, 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자리에서 몰아냈다. 4월 동안 벌인 이런 기습적인 세 번의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고 만다. 취임 석달만에 18명의 장군이 옷을 벗고 떨어진 별 40개가 넘었는데, 은하수 이는 전두환이 12.12를 일으켜서 상급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의 숙청작업이었다.


여기까지를 1차 하나회 숙청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처음 의도는 여기까지였다. 하나회 숙청이 목적이 아니라 김영삼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만 도려 내는 것이 목적이였다. 이때문에 하나회의 수장들만 날렸고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하나회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7월 9일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망언을 지껄여서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김영삼과 비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하나회 청산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했고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 장군은 보직해임과 동시에 강제전역되었다. 대통령과 군 주요 지도부는 아예 하나회에 대해 이전의 득세를 모조리 다 없던 것으로 할 만큼의 대대적 탄압을 벌였고 이후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진급에서 멀어진 것도 모자라 아예 강제 전역까지 당하는 2차 숙청을 당했으며 그렇게 하나회 출신 장군들은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회 장성들이 정리된 이후에는 영관급 인사들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김영삼의 의도는 하나회 수뇌부 정리였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보도 제목인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등이 말해 주듯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 할 만한 수뇌부만 숙청하는 것이였다. 장성급이야 정치색으로 찌들대로 찌들었지만, 영관급 이하 들은 원래 기수별로 영남 출신의 성적 최상위권자들을 선배들이 미리 찍어 집요하게 스토킹하여 구성했던 만큼 최소한 공부는 잘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회에게 당한게 많던 권영해 장관과 김동진 육군총장은 이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관례상 국방부 장관은 예비역 대장, 차관은 예비역 중장이 하는 것이 일반적이였지만, "일개 소장 출신이 어쩌구..." 하는 비난 첩보를 들은 예비역 소장인 권영해 장관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김동진은 육사 17기 수석졸업자로 초 엘리트이지만 전북 전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남 사조직인 하나회에게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 왔는데, 일례로 육참총장 이전 김동진의 보직이었던 연합사 부사령관은 육참총장 경쟁에서 밀린 4성 장군이 가는 자리였다. 그래서 김동진은 하나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유능한 초급장교 보호 차원에서 대통령 동의를 얻은 후 H호텔 일식당에서 이들을 만나 여기서 그만하자고 하였다. 권영해 장관은 그런데로 납득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동진 총장은 정색을 하였다.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하나회 출신은 계급을 막론하고 하나회라는 이유만으로 진급과 직위에서 계속 배격당했고,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망했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을 선출하는데 김영삼은 "5.16, 12.12에 가담하지 않았고, 하나회 출신과 부정부패자는 안된다"라는 기준을 내세웠는데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할 수 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 라인인 보훈처장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 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 척결이 목적이였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라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하였다. 이후 이병태가 '일산 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된다. 심지어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군참모총장 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으로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에게 시킨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 대령이 험악하게 나오게 된다.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러한 일화를 봤을 때 김영삼이 노리던 것은 반기를 들만한 세력 척결일 뿐, 자신에게 충성만 바치면 그만이였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비하나회 출신 비영남권 군인들이였다.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체포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하였다. 노태우의 경우 징역 22년,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 사면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김대중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고 나오는데, 전반적으로 회고록의 성격이 잘한건 다 내가 하고 못한 건 다 김대중이 했다는 식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5공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1997년 대선까지도 김대중 비토설이 흘러나왔다.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 때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민정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사람이 안 나와서 모셔간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자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하나회 출신들에 대한 자진신고를 받았는데, 하나회는 군내 사조직으로써 명단이나 체계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되었기에 하나회 출신들과 잘 어울리고 진급이 잘 되던 장교들은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며 자신신고를 해 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후에야 그들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김동진 육군참모총장(경복고), 김희상 국방비서관(경복고),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경복고) 등 이른바 경복고 라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 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김현철이 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김희상도 전혀 몰랐다는 말도 있다) 흥미롭게도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김현철 본인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숙청 과정에서는 김현철이 개입하지 않았고, 숙청 이후 인선 과정에서 경복고 라인으로 일부 개입한 것 같다.


하나회 척결은 금융실명제 실시 등과 더불어 김영삼 대통령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해체의 부작용?]

노태우는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한국논단, 노태우 등의 주장에 억지가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하나회 숙청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나회의 구성원들은 주로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회에 가입했다가 하나회 영관급 숙청 때 대거 전역하면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단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린 것.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회는 독일 1차대전 에이스들이 모여서 후학을 양성한 항공클럽처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한 사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위에서 설명한대로 하나회 군인들은 전방이나 베트남 같은 실전에서 복무한 경험은 적었고 국방부, 수방사, 기무사 등을 맴돌면서 편하고 중앙에 가까운 보직을 독차지하고, 기껏 파견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기도 등지로 파견 나간 것이 고작이었고 덕분에 공부잘하던 사관학교 우등생들을 정치만 잘하는 정치군인으로 만들어 버린게 하나회다. 대부분의 정치군인들이 그렇듯 이들도 군사적 능력은 대부분 개판이였고 정치적으로 뇌물, 아부하는 능력만 뛰어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오히려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비 하나회 군인들은 대부분 대위나 영관에서 전역하는 판국이였다. 해체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장성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임명하고 이걸 하나회의 두목인 전두환 노태우가 인정하는게 관행이었고 이렇게 요직과 진급을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른다. 즉, 군대 내 계급이 붕괴되었다는 소리.

노태우가 주장하는 강릉무장공비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박정희가 유신에 반대하는 채명신 등을 내치고, 정치군인인 '노재현'이나 '하나회' 같은 정치군인을 기용하면서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얻은 게릴라전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이것이 곪아 터진것이 강릉무장공비사건으로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위장용 식수(飾樹)를 여유있게 가져가지 않는 점과, 인식되기 쉬운 노란색을 계급장으로 쓴 어리석은 행위가 있다. 이러한 것부터가 정치군인 집단이 끼치는 악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휴전선에 배치된 9사단의 29, 30연대를 반란에 동원했는데, 당시는 박정희 암살로 인해 2급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 전방사단의 병력 절반이상을 빼내가버렸다. 만에 하나 혹부리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공격을 시도했다면 한국군은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진짜 잘못되었으면 30년전 처럼 낙동강까지 밀렸을 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결국 노태우가 말하는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조리 노태우가 소속된 하나회의 악영향이고 결국 노태우는 적절히 자기디스를 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불법조직이다. 당연히 불법조직을 해체하고 그 조직원을 처벌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부작용 때문에 불법조직을 놔둔다면 조폭을 시작으로 탈레반이나 IS 같은 테러조직, 그리고 윗동네의 김씨조선도 현지 치안을 위해서 존속시켜야 한다는 요상한 논리도 성립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회]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여의도 정치 바닥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강창희가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도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황진하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그외 정당에는 2010년 4월 30일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천안함 피격사건 원인 규명 회의당시 '군번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자유선진당의 이진삼도 있다. 청와대 출신 인사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위기관리실장을 역임한 안광찬(육사 25기. 예비역 소장)이 있다. 강창희 의장과 황진하 의원, 안광찬 실장은 12.12 사태때 쿠데타군을 막고자 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전사한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중령과 동기다. 심지어 강창희 의장과 김오랑 중령은 1978년 소령때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던 중 같이 찍은 기념사진도 존재한다.

정치권외에도 성우회, 재향군인회, 육사 동문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예비역 장성모임 등에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터진 전두환 육사 사열 논란 등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거기에 이들 단체가 원로라는 이름으로 국내 군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군내 하나회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역 후에 사조직 만드는 것을 뭐라 할 수 앖고 그러면서도 선배란 이름으로 조언까지 하니.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청죽회라는 대항 조직 성격의 사조직도 있었다. 하나회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심 인맥이라면, 청죽회는 이북과 경기도 출신 인맥으로유명한 사람은 김종호 전 내무부 장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있다. 이외에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의 사조직 등도 있었다. 

하나회가 해체되면서 같이 해체되었다고 하나, 2000년 이후에도 나눔회 인맥이 조직적으로 군인사에 개입한다는 폭로성 언론 기사가 몇 차례 나왔다. 2016년에는 알자회에 대한 언론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 믿었던 군대 내 사조직이 아직도 건재하며,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폭로되었다. 2014년 경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기수 별 10명씩 총 120명이 가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름의 유래는 "알고 지내자"는 모임이란 뜻에서 알자회라고 한다. 육군 내에서는 알짜 보직을 주고받아 '알짜회'''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저 있다고 한다. 박근혜정부에서 알자회 출신 인사가 기무사 사령관, 국정원 국장에 임명되는 등 아직 건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다음 인사이동 시 알자회 출신 인사들로 수도권 일대를 채우려했다는 내용도 청문회를 통해 나왔다. 하나회의 전례를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