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시대에서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참된 군인 '장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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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에서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참된 군인 '장태완'


2017. 6. 8.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대한민국의 군인. 1931년 9월 13일 ~ 2010년 7월 26일. 예비역 육군 소장.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다미아노.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이 당시 장태완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갑종으로 분류되어 장교로 임관하였으나, 같이 갔던 인원 중 중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을종으로 분류되어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물론, 군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서 졸업을 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이 대졸인 것은 맞다.


그는 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 취급이었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았다. 1973년 윤필용 사건이 터진 이후, 준장 계급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이 때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갑종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항명하던 김상구 포병대대장을 영창에 보냈다. 이 일로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79년 11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수도경비사령관 직위로 보직이동을 명받았다.

<10.26 사건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오른쪽 찻잔 든 이)이 부임 나흘 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현 제1경비단의 전신)을 초도 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 현황을 브리핑 받고 있다.>


갑종 출신인데도 수도경비사령관(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 2017년 시점에서는 중장 직책이다.)에 올라갔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누가 보기에도 非육사 출신 육군참모총장에 적합한 인물었다는 평이 많았는데,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면서 승진할 기회가 사라졌다.

"군인 장태완"은 부하들 체력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다. 체력이 우수한 병사에게는 포상휴가와 자력표에 유리한 평점을 줬다. 그만큼 훈련성적이 좋으면 대접도 좋았다. 물론 "인간 장태완"은 매우 자상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장태완이 육군 소장인데도, 일개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끈을 몸소 묶어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가 부임하면, 휘하 병력에게 나오는 식단도 매우 좋아진다. 거기서도 쇠고기, 달걀찜, 깻잎 무침을 비롯한 고급 반찬이 특식으로 많이 나왔다. 지금은 달걀찜, 깻잎 무침이 많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때는 고급 반찬이었다. 그만큼 장태완이 휘하 병력에게 돌아가는 식단을 눈여겨봤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어느 날 갑자기 사병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기 때문에, 급양관이 요령 피울 엄두도 못 냈다. 장태완은 조금이라도 군 전투력을 높이려고 매우 노력했다.

게다가 본인에게 엄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70세가 훨씬 넘었는데도, 근육질 몸매를 유지할 정도였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정권의 12.12 쿠데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불법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수경사령부로 달려 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순식간에 태반이 넘게 기울어 가던 중이었다. 기선을 잡고 득의양양하여 자신마저 회유하려 드는 신군부 측에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반란군에게 전화통화로 한 말이며 절대 후대의 윤색이 아니다.

물론 말만 저렇게 늘어놓지 않았고, 실제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참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육본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고, 휘하 전차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보안사령부의 공작에 의해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 하여, 끝내 진압에 실패하고 체포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저항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받아 들이고, 부하들의 안위를 생각하여 치욕을 감내하기로 한 것이라고.

이거가지고 장태완 장군을 패장이라 폄하하는 몰상식한 이도 있는데 당시 상황을 안다면 이보다 무식한 소리가 없다. 일단 당시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령부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다. 게다가 수경사 헌병단과 핵심 전투병력인 30, 33경비단을 맡은 장세동과 김진영이 쿠데타 주축이었다. 수경사 내에서 회유당하지 않은건 비전투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 이었다.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휘하로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찾았던 수기사와 26사단은 출동준비명령은 받았으나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고 종국에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공작에 넘어가 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부천 IC까지 다다랐던 9공수여단은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에 의해 주둔지로 원복당했다. 그 외 1, 3, 5 공수여단은 쿠데타군 주축이었고 9사단과 20사단도 사단장이 노태우와 박준병이니 말 할 필요도 없다. 제2기갑여단은 여단장 이상규가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출동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예하 16대대를 출동시켜 쿠데타에 합류했다. 11사단은 국방장관 명령이 없어 출동하지 못했으며 30사단은 사단장 박희모가 보안사에 협력하여 행주대교를 차단하고 구파발 검문소의 병력을 증강하여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하고 길을 열어줬을 뿐 아니라 90연대를 쿠데타에 합류시켰다. 한 마디로 고립무원이었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겨우 24일째였던 장태완 장군은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야포단을 도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1 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장악하여 여의치 않게되자 사령부 행정병, 취사병들까지 긁어모아 맞서보려 했다. 그러나 취사병, 행정병 다 합쳐도 100여명 이었고 김진영이 수경사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이 보낸 33경비단의 전차 1개 중대를 도로 회군시켜버려 사령부내에 있던 전차 4대가 기갑전력의 전부였다. 즉, 방법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치욕을 감내한 것 이다. 만약 거기서 싸우기로 했다면 보안사에 의해 수경사 통화가 모두 감청당하는 상태에서 9사단 29연대, 30연대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1, 3, 5 공수여단, 2 기갑여단 16대대, 수경사 30&33 경비단을 비전투 병력 100여명으로 상대하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게 가능할거 같은가? 이때나 그 후에나 국민의 안위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쿠데타 세력과 달리 장태완 장군은 서울시민들의 안전도 신경써야 해서 몇 안되는 중화기 사용까지 제한받았다. 설사 9공수여단 병력이 중도에 복귀하지 않았어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군인의 의무를 저버린 장교들과 공관 근처에서 총소리 들리자 단국대 캠퍼스로 달아나 숨어 버리고 겨우 육본 B-2 벙커로 끌고왔더니 충정부대 출동명령을 내리긴 커녕 어떻게든 싸워보려던 장태완 소장에게 말로 하라며 윽박지르던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다. 이 사람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 26사단, 9공수, 11사단들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그 사단 안났다.

참고로 12.12 당시 장태완 사령관의 잘못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해 진압군을 동원할 때, 국군 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에게 아무런 보고나 연락없이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2005년 5월 14일에 방송된 드라마 제5공화국 제7화에서 김기현이 연기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12.12 반란군을 꾸짖는 장면. 급하면 2분 58초부터 보면 된다. 위 영상에 해당하는 내용은 3분 49초부터, 하이라이트는 6분부터. 장태완 장군이 그려진 매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영상이다. 김기현이 매우 강렬한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 네티즌을 단박에 매료(?)시킨 것. 이후 여러 합성에 등장하며 '장포스'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얼굴 또한 역대 배우들 중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편이다.


군사반란 이후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은 뒤, 5년 후배인 전두환 때문에 강제로 쫓겨났다. 그리고 여섯 달이나 집에서 갇혀 지낼 만큼 힘들었다. 12.12 군사반란 직후에 수경사령관(현 수방사령관) 직에서 잘린다. 수경사령관이 된지 고작 1개월 내외만에 터진 일이었다. 후임자는 하나회 부두목 노태우였다.

장태완 장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는다. 친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1980년 4월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0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고등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들어갔고, 그 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한 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는데, 내용은 이렇다.

고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을 유랑했고,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는 그 전두환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던지 그를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였고, 그는 어쩔수 없이 사장직을 수락하였다. 또한 1995년부터는 훗날 직원학대와 사기분양 사건으로 유명해진 르메이에르 회장직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르메이에르의 각종 병크가 터진것과 장태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993년에 <12.12 쿠데타와 나>라는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현재 절판되었기에 국회 전자도서관에서 원문보기가 가능하다.

이후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5·6공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때 증언을 마친 후 두 사람을 향해서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그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386세대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집권여당 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2002년 6월 북한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기는 했지만 노무현 후보와는 껄끄러운 관계였고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한미 FTA 등에서 기존 친노와는 거리가 있는 입장을 보였는데 이것 때문에 오늘의유머나 서프라이즈 등의 사이트 들에서 당시 민주당, 한나라당과 엮여 나라 팔아먹은 의원이라고 느닷없이 욕을 먹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잘 찾아보면 2000년대 당시 그쪽 성향 사이트들에서 까는 의원들 목록 짤방에 장태완 의원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장태완은 6.25전쟁을 경험한 군인 출신이었고, 정치관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가 민주당계열 정당에 들어간 것도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유사한 예로 신군부로부터 탄압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 역시도 꼬마민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지역구 선거에도 출마했었다. 그런데 강창성 장군의 경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꼬마민주당 2기)이 DJ의 정계복귀와 3김정치로의 회귀에 반대하면서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을 선언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공천되었다.

이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별세, 그리고..

2008년에는 폐암으로 폐를 3분의 1이나 잘라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되었다고. 이후 몸을 추스르며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2010년 7월 26일에 숙환으로 숨졌다. 이때가 향년 78세.

그런데 장례식장에 장세동이 방문했다.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장세동은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서, 장태완 소장의 직속 부하였다. 장태완 장군이 비록 수경사령관에 취임한지 1달 여밖에 안되었다고는 하나,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에는 대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 대한민국 국군이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체포를 그토록 망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걸 두고 신군부 인사, 故 장태완 前의원에 '화해의 손길'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났는데,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그리고 2011년에 또 논란이 되었다,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경호실장이 대전 국립 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를 제17기로 마치고, 하나회에 몸담았다. 참고로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도 안현태와 육사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정을 다한 놈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구속되면서 군 형법상 반란수괴 혐의 등으로 먼저 구속된 그를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돼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 앞에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묘는 하필이면 장태완 장군의 묘와 가까이 있다.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게, 먼저 세상을 떠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묘 옆에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유학성이 묻혀있다. 그나마 장태완 장군처럼 신군부에게 맞섰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아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했으니, 장태완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2012년 1월 17일에는 장태완의 부인이, 강남구 대치동의 아파트 화단에서 쓰러져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집 안에서 유서가 발견된 것을 보아 자살로 추정되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이 날에 신윤희(육군사관학교 제21기 출신) 당시 수경사 헌병부단장이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고, 장태완을 비난하는 책을 냈다. 뭐 말이 필요도 없을 만큼 내용도 형편없다.

김대령은 장태완 장군은 김재규의 부하이며 12.12 군사반란을 장태완 장군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개소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