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이래 최초의 민간거주구역 공격 '연평도 포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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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래 최초의 민간거주구역 공격 '연평도 포격 사건'


2017. 6. 7.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한반도의 서해 5도 중 하나인 대한민국령 연평도를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포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휴전 이래 최초로 발생한 민간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이다.

그 전의 도발과는 달리 민간인 거주지역이 포격을 당했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망자까지 나온 상황이었기에 조금만 수습이 늦었어도 정말로 휴전이 깨질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건 이전]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부터 호국 훈련을 실시한 대한민국 국군에게 실질적인 침략행위라고 항의를 하였고 한국군은 기존의 훈련이라고 통지문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이후 기사에 따르면 호국 훈련보다는 그냥 일상적인 사격훈련이었다고 한다. 즉 그냥 핑계. 애초에 포격을 작정하고 적당한 구실을 붙인 거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훈련을 하지 않았더라도 연평도 포격 사태는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단순히 남한만을 상대한다면 구실 그딴거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선제 공격당한 상황에서 발발하는 전쟁에만 개입하도록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북한이 선제 공격 당했다고 보도하는 매체는 당연히 북한 내 매체뿐이다. 중국 또한 북한이 먼저 포격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포격 3시간 전 정보참모부의 수시첩보보고로 사전에 포사격 징후를 포착해 청와대와 국방부 장관 등 20여개 기관에 알렸음에도 당시 정부와 군 지휘부가 이를 묵살했다.

[사건발생]

11월 23일 오후 2시경, 연평도에서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 초등학교 학생들은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때는 연평어린이집의 원생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군인의 안내를 받아 대피소 안으로 피신했고, 이후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있는 대피소에 모여서 컵라면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연평도에서는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텔레비젼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화가 되기 시작했다.


[포격과 반격]


▲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의 포격이 시작됐다. 포격 직전 연평도로 입항했던 여객선에서 찍힌 동영상. 북한군 포격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 2010년 11월 25일 국방부가 공개한 최초 피격 순간을 담은 사진. 저 사진을 찍은 연평부대 정훈장교 이성홍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저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 대위는 부대원들의 포 사격훈련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사격훈련이 모두 끝난 뒤 잠시 후 앞쪽에서 잇따라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솟자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서 그 순간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겼다. 그 뒤 그게 적의 공격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고, "빨리 피해"라는 고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대피호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즉 마침 훈련 홍보촬영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적 포탄이 떨어진 직후의 순간을 그대로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적의 포격임을 파악하자 포병들은 자주포들을 일단 포상 내부로 숨기고(소산) 나머지 병사들도 대피호로 대피하였으며, 2시 41분경 적의 포 공격이 멈추어 잠잠해지자 K-9 3문을 포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어 2시 47분경부터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K-9 자주포의 뒤에 보이는 화염에 대해 일각에서 열압력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진의 화염은 대구경 열압력포탄에 의한 화염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으며, 열압력탄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위로 피어오르는 형태의 화염을 내지 않는다. 포상에 있던 타이어가 타서 그렇다는 의견도 있는데, 실제로 2011년도 진지보수 공사때 타이어를 제거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사진에 대해 국방부는 장약에 불이 붙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한민국은 당일 오전 정상적으로 훈련을 실시했고 남쪽을 향하여 사격했으나 북한은 남한측 도발로 규정하고 오후 2시 34분 대연평도에 기습적으로 포탄을 발사했고 남한 역시 2시 47분부터 이에 대응하였다. 북한군의 초반 포격에 한국군은 2대의 K-9 자주포가 손상되었고 한국군은 남은 3대의 K-9로 50발의 보복 사격을 무도의 북한군 기지를 향해 가했다. 30발쯤 사격할 때 1대를 긴급수리해 4대를 투입. 이후 북한이 다시 레이더 기지를 노리고 개머리 반도에서 포격을 개시하자 한국군은 다시 30여발의 포를 개머리 반도에 발사했다.

교전이 중지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 170여 발의 포를, 한국군은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합참의장의 발표에 따르면 오후 3시 41분 일단 포격은 종료되었다.

이 공격에서 북한이 방사포를 사용했다고 한다. 122mm 로켓탄 일부가 연평도에서 발견되었다는데, 이는 북한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이번 공격을 준비했다는 증거다. 방사포는 해안포 부대에 배치되지 않은 군단급 지원화기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포탄 중 절반 정도는 바다에 떨어졌고 나머지가 연평도에 떨어졌다고 한다. 발견된 탄피로 볼 때 사용탄은 130mm과 75mm 포와 방사포탄. 군측에선 앞의 두개로 영점조준을 하고 방사포를 메인으로 때려버린 거 같다고 한다. 문제는 오차도 매우크고 지상에 떨어진 것 중에서도 불발탄이 20여발이나 되어 군이 수거하였다. 그러니까 지상에 낙하한 것만 불발탄 비율이 약 30%가 넘어갔다. 지상에 유효타를 본것도 30%정도. 그것도 수도권을 노리는 4군단에서 미리 준비해놓고도 이렇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탄약 관리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포격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국군이 급히 F-15K와 해군 함정들을 보내자 북한은 MiG-23 3대를 출격시키고 경비정도 출동시켜 공중과 해상에서도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다. 이를 볼 때 북한은 확전이 될 것도 각오하고 이번 도발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포병사격 최초대응사격이 13분이상 걸려, 평소 군 당국이 공언하던 5분이내 대응사격에 비해 지연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K-9 6문 전체가 사격훈련 중 사태가 발생하여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대응사격 역시 상당히 늦게 이뤄졌으나, 정밀타격을 위해 사격원점을 찾는데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군이 해명하였다. 사실 말이 쉽지, 장거리도 아니고 그런 지근거리에서 포를 발사했는데 이를 사전에 포착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피격 원인 파악을 서두르다 오판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대응하면 얄짤없이 2차 한국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초기 추정치였던 50~200발의 포탄에 대응해 일반적인 3배 대응원칙으로 반격했으면 150~600발을 발포했어야 하는데, 80발 정도만 대응사격한 것이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다. 다만 이는 사건 당시 섬 일대에 정확히 몇 발이 떨어졌는지 알수 없는 상태에서, 현장지휘관이 임의로 판단한 적 포탄사격수 계산에 의한 반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일단 워낙 급작스럽게 경황없이 선제공격을 당한 사건임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지만 사격한 4대(초기 3대)는 오전에 훈련을 하여 탄약이 부족했고 2대는 초기 포격으로 파손당하고 전력에서 이탈, 나중에야 1대가 긴급수리로 복귀했고 1대는 처음부터 불발탄으로 인해 물리적으로도 즉각 응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병대가 설사 포탄이 200발 이상이 떨어졌는것을 알았어도 포탄의 재고량 때문에 600발을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평도는 섬이다보니 언제 포탄이 다시 보급될지 알 수가 없으며, '''지휘관 입장에선 이게 "도발"인지 아니면 "제 2차 한국전쟁"의 시작인지 알 도리가 없다. 즉, 해병대로선 북측이 연평도 포격을 하루 하고 다음날도 계속 포격을 할지 아니면 한 시간 포격하고 끝낼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포탄을 대량 소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

포격은 최소 50발, 몇몇 언론에 의하면 150발이 넘는 포탄이 1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합참의 초기보고에선 약 100여발, 후에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바로는 약 170여발이라고 발표했다가 100여발로 수정하기도 했다.

북한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고, 떨어지는 포탄들 중 몇 개가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상가 건물이 붕괴되었다. 또 해당 지역 소방서에는 차량이 1대뿐이며 전담 소방요원도 2명밖에 없는데다가 전기도 끊어진 상황이라 진화 작업이 힘든 탓에 마을이 전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다급히 24일에 소방차 24대가 긴급 투입되면서 포격으로 10여곳에 발생한 산불과 가옥과 창고 등을 태운 주택가 화재까지 모두 진화되었다.

대치 중이던 F-15K와 MiG-23은 결국 MiG-23이 도주하면서 남한 측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1,7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를 완료했으며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부두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발발 직후 연평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고, 23일 오후 11시 일부 주민들은 어선으로 인천으로 대피하였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다음 날인 24일부터는 본격적인 피난이 시작되었다. 해경의 지원 하에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우선하여 346명의 주민들이 해경 경비함 두 척에 나눠 타고 오전 7시에 연평도를 출항, 오후 2시경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해경 공기부양정과 해군 공기부양정(러시아제 무레나)이 167명을 추가로 더 태우고 오후 3시에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7시에는 다시 추가로 17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25일에는 운항이 재개된 여객선과 해경 경비정을 이용하여 추가로 172명이 인천으로 피난했다. 25일까지 연평도 전체 주민의 80%에 달하는 1,115명이 인천으로 대피했고, 남아 있는 민간인은 약 280명 선이다. 외신들은 연평도 마을들을 둘러보며 유령 도시(Ghost town)란 표현까지 썼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는 걸로 파악되었으나, 11월 24일 오후에 민간인 2명의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25일 오후 4시 10분 인천에 도착했다.

2010년 11월 26일 오후부터 어민들의 조업이 재개되었다. 쳐놓은 그물들을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허가를 내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목숨같은 그물을 건지러 가는 어민들의 심정이 충분히 예상된다.


[한국 정부의 대응]

한국 정부는 확전을 우려하여 중국 측에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북한군에게 사격을 중지하라는 전통문을 지속적으로 보냈으나 포격이 2010년 11월 23일 오후 3시 40분 경까지 계속 진행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포병 사격도 계속되었다.

군 당국은 23일 국지도발 최고 대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경찰 또한 인천광역시 전역에 갑호비상을 내렸다.

개머리 해안 근처 해안포 진지에서 발사된것으로 추정되며 한국군은 K-9 자주곡사포등 연평도에 주둔중인 자주포를 동원하여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으며, F-15K 전폭기 및, KF-16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군은 오키나와의 F-22와 공중급유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켰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대응 지침에 따라 일단 이 상황의 확산을 막고 부상자의 후송과 치료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표명하였으나, 이후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에 의하면 민간인 포격은 용납할 수 없으며, 추가 도발이 있으면 강력하게 타격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앞서 언급한 단호한 대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23일 9시 30분에는 청와대의 공식 브리핑에서는 '추가 도발도 예상되므로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다시는 도발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언급이 나왔다.

이 확전 자제라는 지시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정부의 해명은 회의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는 과정 중 일부 참모들의 발언에서 그런 말이 야기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다음날인 24일 오전 국회에서 증언한 국방장관의 발언 역시 오후에 번복되었으며, 청와대 공식 트위터의 내용 역시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이명박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도 이명박은 "확전하지 말라고 얘기 안 했다. '공군 뒀다 뭐하냐'고 했다. 당시 (국가위기관리센터 긴급회의에) 배석했던 한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전한 거다. 그 후 나도 책임 추궁을 했다.며.... 그 트윗관련해서 책임을 추궁했다고 한다.

사건 종료 이후 국방부 관계자는 K-9로 적의 포병 진지를 집중 사격했으므로 북쪽에서도 피해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연평도 포격당시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 <임무(DUTY)>에따르면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 한국이 보복을 계획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말렸다고 한다. "보복계획에 공중공격과 포격이 포함됐으며 과도하게 공격적이었다"고한다. 미국은 보복이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자신,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까지 며칠에 걸쳐 이명박 대통령 등을 설득했다고한다.


게이츠는 이후 한미가 핵항모 조지 워싱턴호가 참가하는 서해 연합훈련 실시에 동의했다고 밝혀 이를 조건으로 보복계획이 철회되었음을 추정할수 있다.

이 게이츠의 회고록 내용은 당시의 연평도사건과 관련해 미국에서 공개한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에서 2010년도 당시 서해상에서 실시된 한미연합군사훈련과 동일하다.

[이후 조짐]

이전 북한의 어떤 도발과도 다르게 직접적인 남한 영토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볼 때, 확전의 가능성이 어떤 형태의 도발보다 높았다.

백령도에서도 북한군 해안포 입구가 개방된 것이 확인되었고.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민방위 동원령이 발효되었으며, 연평면에 대하여 통합방위 을종사태를 선포하였다. 더불어 서해 5도 지역에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공식적으로 대피령이 발효됬었다.

포탄이 산너머 섬 남쪽에 착탄한 것을 봤을 때 직사로 쏘는 해안포가 아닌 곡사포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만 76.2mm 포가 아닌이상 주력포인 130mm, 122mm포로는 충분히 타격이 가능하다는 관측이다.


26일 북한에서 급작스럽게 포성 비슷한 2번의 폭발음이 3시 3분, 3시 40분 두차례 총 4번 들려왔으며 국방부에 의하면 총 6번의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이에 한국 정부는 조사 결과 연평도와 인근 해상에 이상이 없었던 점을 미뤄 볼 때 포격 훈련을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훈련한다는 핑계로 애꿎은 섬을 날려버린 주제에 자기들 훈련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

[안타까운 점]

이 사태로 연평도 주민들이 일정 기간 연평도를 비운 사이에 몇몇 절도범들의 절도행위가 발생하여 경찰에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15년 전 일어난 대형참사였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때 혼란을 틈타 약탈을 했던 인간이하의 종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결국 대형 참사나 전쟁 혹은 국지 도발로 치안 혼란이나 치안 공백이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또다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도발의 이유]

현재까지 연평도에 가해진 북한군의 공격은 그 전에 비교하면 유래가 없는 수위의 무력도발인데 그 이전까지는 간첩이나 특수부대의 침투나 테러행위를 제외한 정규군간의 충돌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군 기지와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 거주지까지 포격을 가하여 인명살상까지 자행한 것은 전쟁해서 죽이자고 협박하는 수위이기 때문에 왜 이렇게까지 나왔느냐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공격한 지역들이 10년 전 보안대나 해병대 내무반 위치인 듯 하여 의도적으로 조준 사격을 한 것 아니겠냐고 주장하였다. 공격받은 지역 중 10년 전 보안대나 해병대 내무반 건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KBS기사의 동영상을 보면 민간인 거주구역 전체에 걸쳐 총 '38곳'이 골고루 피격당했음을 알 수 있고, 그 중 몇 곳이 옛날 군사관련시설이라고 해서 북한이 군사관련 시설만 타격하려 했으며 민간인을 사살할 의도가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만에 하나 북한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킬 경우 남한에게 상대도 안되는 북한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은 북한 군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까지도 북한군 포격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김정은 후계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일종의 무력 시위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에는 김정은이 해안포대초소에서 신분을 숨기고 근무를 하고 있다는 둥 김정은 우상화식의 소문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포술에 조예가 깊대나 어쨌대나는 식의 소문 말이다. 게다가 김정은이 승전한 해당 포병대를 극찬하며 위무했다는 사실이 북한 내에 보도되면서 설득력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북한이 본격적인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하여 우라늄탄을 만들 정도의 우라늄을 확보했다는 말이 나온 게 고작 이틀 전(11월 21일)으로,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예상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의 피해]

▲ 이 사진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연평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문자 그대로 1950년으로 돌아갔다. 전직 사진기자였던 군청 공무원이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포격이 끝난 후 확인된 한국군 피해는 해병대원 2명 전사, 6명 중상, 10명 경상이며, 민간인 피해는 2명 사망, 3명 경상이다. 단 조선일보에서는 민간인 경상자를 58명이라고 하는데 사건 이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격 사건 이후 섬 주민 중 58명이 (가까이에 포탄이 터져서) 귀가 잘 안 들린다던지 잠이 안 온다는 등의 각종 이유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경상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냐의 문제인데 사실상 섬 주민 전체가 PTSD라는 부상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게 된 셈이다.

해병대 장병 중에서는 중상자 4명을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중상자 해병 연평부대 소속 병장 서정우와 이병 문광욱 두 해병이 전사했다.

▲ 서정우 해병은 휴가를 가기 위해 부두에서 배 편을 기다리던 중 북의 포 공격이 시작되자 휴가 인솔 부사관의 복귀명령에 따라 차량을 타고 가다가 다른 동료 2명과 내려서 인근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다 방공호를 300여m 가량 남겨 놓고 인근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숨졌다.


문광욱 일병은 대피호에 있던 중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주변에 터진 포탄 파편에 가슴을 관통당해 숨졌다.

그런데 이를 두고 군 장성 출신이자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황진하 의원은, 대피호에 들어가 있던 중 선임과 함께 담배 피우러 대피호 바깥으로 나갔다가 파편에 맞았기 때문에 전사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해서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 11월 24일자로 전사자 일계급 특진 때문에 보도에는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으로 나오고 있다. 발견 당시 서 하사의 시신은 두 다리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고 전해지며 23일 밤에야 나머지 신체를 피격 현장에서 찾아내 병원으로 모셨다고 한다. 또한, 서 하사가 휴가 때문에 착용하고 있던 정모의 해병대 모표가 떨어져 나무에 박혀 있던 것을 뒤에 사진 촬영 후 수습했다. 문 일병은 눈을 뜬 채 숨져 있어 영안실에서 큰아버지가 눈을 감겨 줬다고 한다.

▲ 소나무에 박힌 모표, 이후 다시 복원하여 보존해놓았다. 사진의 모표는 교체된 듯.


군 부대 시설도 공격을 받아서 파괴되었다. 그러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K-9 자주곡사포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3대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1대는 바로 직전 사격훈련때 발생한 불발탄이, 2대는 전자장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전자장비가 고장난 2대 중 1대는 임시로 해결 후 사격을 계속했다고 알려졌고, 다른 2대도 발사를 못했을뿐 별 다른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 피해는 김치백(61), 배복철(60)씨 사망, 경상 3명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연평도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를 하던 인부들로 처음에는 실종상태였으나 결국 숨진채 발견되었다. 사망자 두 명 모두 시신이 손상된 상태이며, 한 구는 신체 대부분이 손상되었고 다른 한 구는 컨테이너 화재로 인해 하체가 손상된 상태로 발견됐다. 포격에 의한 화재가 원인인 듯하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앞으로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 주민들의 삶이다. 북한군에게 반격하여 적에게 얼마나 보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전쟁과 전혀 무관한 시민들, 민간인들은 북한군이 전쟁과 상관없는 비전투원이자 민간인 거주 지역에 포격을 가하여 살상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대피한 주민들은 그 당시 상황에 대한 큰 충격으로 심각한 후유장애까지 호소하고 있다. PTSD마저 의심되는 상황이다. 아예 영구 이주를 하자고 주장하는 주민들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연평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복구 작업을 시작했고 이후 대부분의 주민들이 섬으로 귀환했으나, 이 같은 공격이 계속 발생한다면 연평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질 수도 있다.

이후 보도 통제와 민간인 통제가 이뤄지고 있어서 앞으로는 군기지만 남을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포격사건 1년 5개월 후인 2012년 4월 기준으로 연평도 포격 이후 섬인구가 오히려 150~170명 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주민들도 연평도 포격사태의 끔찍함을 잊고 꽃게잡이 등 생업에 열심이라고. 이후 2012년 4월에 500여명이 피난할수 있는 1호 대피소가 건립되었고 앞으로 연평도 전 인구가 대피하여 생활할수 있는 7개 대피소 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다. 연평도는 포격사태의 후유증을 벗어나려고 지금도 노력중이다.

그러나, 피해 보상 등을 노린 인간이하같은 종자들의 유입 등으로 인해 평화로웠던 연평도는 사라지고 연평도의 치안과 분위기는 이 사건 전에 비해 매우 악화되었다. 사건 전에는 주민들만 있었기에, 연평도 내의 학교에 자유로이 통학도 하고, 집도 열고 잘 수 있을 정도였으나, 사건 후에는 치안과 분위기가 매우 악화되어 2010년 이후에는 다른 수도권 대도시와 같이 등교 때도 부모가 데리고 가야하고 문은 꼭꼭 잠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북한의 피해]

북한의 피해는 추정만 될 뿐 증거가 없다.

북한 측의 피해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측의 피해 역시 상당하리라 본다."라고 언급했으며 대다수 군 관계자들과 전문가들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포대 2개 정도는 초토화시킨 것으로 보인다.2010년 국회정보위에 따르면 무도에는 50여발이 낙탄했고 이중 15발 정도는 막사에 떨어진 탄착점이 확인되었는데 155mm 고폭탄의 살상반경으로 보아 북측에도 사상자가 발생했을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무도의 교통호가 매몰된게 확인되었다고한다. 심지어 무도에서 갱도로 추정되는 곳이 직진갱도에서 u자형태로 바뀌어지는게 확인되면서 북한 해안포중 일부는 운용 인원과 함께 매몰된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구글어스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개머리 진지에 가해진 30여발은 별다른 피해를 가하지 못했을거라는 추정이 우세하다. 하지만 디시 기갑갤등지에서는 사진을 보면 최소한 두 발은 북한군 방사포 진지에 가깝게 착탄했는데 파편에의한 피해는 있었을거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한편 네티즌들이 당시 위성사진을 수집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시각 연평도에서는 검은 연기가 확인되었으나 북한의 강령반도에서는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군의 탄착 지점과 북한의 피해 상황이 확인될 때까지 대응의 적절성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UAV등을 이용한 정찰결과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갑작스레 민가 사격을 당한 측'과 '철저히 계획적으로 준비해 포격한' 양측의 상황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위 기사에 나오듯 대응 사격한 지역에 존재한 것은 이미 '빈 막사'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큰 효과를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안포에 대한 타격 대책은 물론 마련해야겠지만 단순 비교는 힘들다. 일단 이러한 의혹들에도 불구하고 25일 군에서는 북에 상당한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중. 피해결과를 계속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국쪽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의 피해가 더 크다는 말이 있었다고.

대포병 레이더도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의 1차 사격당시 좌표를 알아내지 못해 시간이 지난후 2차 사격때 좌표를 잡아냈다고 국방부는 발표했다. 거기에다가 연평도에 배치한 대포병 레이더는 스웨덴제 신형이 아니라 기존에 운영하던 구형 미국제 AN/TPQ-37이라서 표적 입력을 수동으로 해야 하며 ECCM 능력이나 자동 추적능력 등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주한미군거는 신형이라서 앞에서 언급한 기능은 보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동으로 포병과 자료공유가 가능하다.

....라지만 실제로는 기상제원의 문제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포병부대는 X시간마다 군단 관측소의 메트로를 받아 장입하는데, 이 기상은 사격위치와 상당히 먼 지점에서 측정하고, 측정값도 X선까지만 측정하여 정확도가 낮다. 과거에 K-9실사격 훈련시에는 반드시 기상관측반의 동행을 요구했고, 인근에서 15선까지 측정한 완벽한 기상을 BTCS에 장입하면 조정없는 효력사가 초탄에 가능했다. 문제는 이 관측반이 군단에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것.... 겉으로 보이는 화력만 중시하고 그에 따른 지원을 무시하는 군 교리상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 사태다.

국회 질문에서 K-9이 6문밖에 없다는 것이 지적당하고, 1개 대대(18문)를 배치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국방장관은 12문을 배치하겠다는 답변을 했었는데, 26일 18문으로 추가 배치하겠다고 다시 정정되었다. 군의 발표에서 초기 대응한 k-9의 숫자가 계속 바뀌는 것(6->4->3)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2010년 12월 27일 김정은은 한국의 대응사격으로 인하여 사망한 북한군 5명에 대해서 영웅 칭호를 내렸다. 이로써 북한군의 인명피해는 최소 5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3월 2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북한 내부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당시 북한에서는 남한의 대응포격으로 1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여기에 따르면 북한 측 사상자는 평양에 있는 북한군 총참모부 산하 중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3월 15일, 탈북자 인터넷신문 뉴포커스에 따르면 연평도 포격 당시 북한군이 주변 농민들에게 수혈을 요청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북한의 반응]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최고사령부 보도를 인용하여 늘 그렇듯이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 측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먼저 연평도의 북한 측 영해에 사격을 가해 군사적 도발을 해왔다.", "우리 혁명 무력은 괴뢰들의 군사적 도발에 즉시적이고 강력한 물리적 타격으로 대응하는 단호한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 "남조선 괴뢰들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우리 혁명 무력의 엄숙한 경고를 똑똑히 새겨들어야 한다.", "앞으로 조선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 존재할 것." 같은 소리들만 되풀이했다.

기본적으로 북한 체제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강도높은 군사행동이 김정일의 지시 없이 행해질 수 없다.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군에 대한 통제가 강력한 북한에서는 실탄사격 한 번 멋대로 했다가 숙청되는 일이 흔하다. 특히 보도의 주체가 최고사령부란 점에서, 전문가들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청해전(2009.11.10) → 천안함 피격사건(2010.3.26) → 재처리 시설 공개 → 연평도 포격(2010.11.23)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1년 조금 지난 수준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도발이 자주, 더 높은 강도로 일어나 북한 내부에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실제 속보가 진행되는 도중에 해외 언론 기자들 사이에서 한 때 김정일 사망 소식이 돌기도 했다는 언급이 나왔으나 유언비어였다. 천안함과 동일하게 3대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권력세습을 하는 과정에서도 강도높은 도발이 나왔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김정일과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격을 가했다는 의견이 많다.

북한 주민들은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서도 알 건 다 아는 모양. 그리고 마침내 포격 사실을 인정했다. 어처구니 없을 만큼 자신만만한 발언.

11월 27일 저녁 조선 중앙 통신을 통해 "민간인 사망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스럽다"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인을 군부대 내에 배치해 인간 방패로 삼은 남측 잘못이라면서 적반하장 드립을.... 북한의 이런 시인은 중국의 압력이 있은 것이지 자의로 한 말이 아닐 거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