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탕산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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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탕산 대지진'


2017. 5. 7.

1976년 7월 28일 3시 42분에 중국 허베이 성의 탕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는 7.8. 다른 말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해」라고도 불리운다.

공식적인 사상자 집계수는 사망자 242,400명, 중상자 164,000명, 불구 3,800명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발표한 내용이지만, 그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문화대혁명 기간으로서 외국인들의 구호 원조를 거부하였다. 촬영하는 외국인 기자를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해서 공항에서 풀어준다거나, 사복으로 위장한 치안요원들이 돌을 던져 내쫓는 행위까지 일삼아졌을 정도. 그래서 일부 사진을 제외한 당시의 사고지역 사진을 찾기가 상당히 힘들다. 남아 있는 사진은 피해지역의 일부만 찍혀있는데, 정작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촬영한 사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이후 여러차례 탕산대지진에 대한 기념사업이 벌어지면서 중국 공산당이 현장 사진을 공개하긴 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실제 추산 사상자는 70만명 이상, 사망자만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피해가 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애초에 탕산이란 도시가 판과 판 사이에 놓인 도시였고, 지반에 생긴 공동으로 지표면이 내려앉는 형태의 직하형 지진이었기에, 「도시가 단 한순간에 가라앉았다」는 표현을 써도 상관없을 정도였고, 또 인구 100만을 넘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던 관계로 지진 피해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대가 충적평야여서 액상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는데, 당시 탕산 시에 있던 건물들은 대부분 아래 기반암에 뿌리를 박지 않고 지어졌다. 당연히 건물이 버틸 수가 없었다. 실제 지진의 지속 시간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고 하며, 여진은 실제 지진에 비하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지반에 단층이 발생해 지반 속에 공동이 발생하고 그 사이로 광범위한 지반이 가라앉은 형태의 지진이었기 때문.


쓰촨성 대지진과는 다른 형태의 피해가 발생했는데, 탕산은 서로는 베이징, 남으로는 톈진이라는 대도시를 끼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당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던 데다가, 공업도시로 공장들이 많이 세워져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과 인천 사이쯤에 존재하는 부천 같은 위치. 그렇지만 여진이 크지 않았고, 지진의 범위가 좁은 직하형 지진이다 보니, 불행중 다행으로 탕산 이외의 지역은 생각외로 지진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탕산 이외의 사상자는 70만명중 8만명 내외로 집계된 것.


중국이 군 병력을 10만명이나 투입했는데도 복구에만 10년이 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범위한 지역이 수미터 아래로 푹 내려앉은 상황인데다 주변에 그나마 내려앉지 않은 지역도 피해가 심각했고, 그걸 메우고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고, 피해가 너무 막심하다보니 그냥 메울 수도 없었기 때문. 실종자 수색에만 총 복구기간 10년중 6년 가량을 투자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처치곤란이던 홍위병들도 이곳에 대거 투입했다고. 그나마 매장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워져서 전염병 발생이 이루워지지 않은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신원확인이 확실히 진행된채로 매장이 이루워진 경우는 적었기 때문에 종종 이산가족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탕산이 광공업도시인 것도 피해 확대에 한몫을 했다. 그 당시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갱도에 매몰된 사람만 수천 명이 넘어서, 매몰자들을 찾아내는 데만 해도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이후 광공업도시였던 탕산은 구호 공산품 생산 도시로 경제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탕산의 복구를 위해 이주권고를 통한 이주로 탕산의 인구를 채우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에 30M 높이의 항진기념비와 항진기념관이 세워졌으며 항진기념관에서 탕산대지진에 대한 자료와 복구 과정을 그린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그렇지만 중국도 경제개발과 세수확충을 이유로 부동산 개발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기념비 근처 지역에 고도제한이 설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탕산항진기념비 옆에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 세워져있어서 추모의 의의가 희석된다라는 의견도 많다.

당시 중국정부에서 탕산대지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력갱생 노선을 내세워서 외국의 지원을 거부했는데 오히려 장비부족 문제로 효율적인 구조에 어려움을 겪으며 피해를 키웠고 그 이후로 중국정부에서 교훈을 얻어서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외국의 원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건 34주년이던 2010년 7월 28일 해당 사건을 극화한 펑 샤오강 감독의 재난 영화 <탕산대지진>이 개봉되었으며 한국에는 2010년 11월 4일 CJ엔터테인먼트가 <대지진>으로 이름을 바꿔 수입, 필라멘트픽쳐스를 통해 개봉하였다. 맨 위의 영상도 이 영화의 지진 장면. 이 영화는 당시 중국에서 최대의 흥행을 기록했다는데, 인민해방군을 너무 띄워준다거나 하는 등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영합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탕산대지진으로 헤어진 가족이 쓰촨성 대지진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눈물나게 그려났기 때문에 탕산대지진 유족들도 탕산대지진 당시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며 봤다라는 후문이었다고.

지진 당시 목숨을 구한 이들의 수기가 담겨진 책자가 오래전에 번역되어 나온 바 있는데, 어느 생존자가 발을 씻은 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지는 통에 갇혀서 보름 이상을 견뎌 살았는데 그 버리려는 발 씻은 물을 마셔가면서 견뎠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지진이 느껴졌다고 하지만, 지속시간이 길지 않았고, 직하형이라 범위가 좁았던데다 새벽시간이었던지라 직접적으로 지진을 느낀 사람들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어나는 대지진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은 만큼 그로부터 2년뒤인 1978년에 9월 16일에는 규모 5.2의 속리산 지진이, 10월 7일에는 규모 5.0의 홍성 지진이 일어났다.

여담으로 이 대지진을 겪은 다음 고베 대지진을 겪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사실 이 지진은 발생 몇 주 전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국가지진국의 전문가 양유천을 비롯한 몇몇 전문가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탕산 근처에 강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것. 그런데 당시가 하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사망을 전후한 문화대혁명 말의 격변기였던지라 이들의 경고는 민심 동요를 이유로 묵살당했고, 최초 발언자인 양유천은 사상교육을 받으러 끌려가기까지 했다. 그들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웃 친황다오 시 칭룽(靑龍) 만족 자치현의 공무원들뿐이었고, 이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지진 대응요령 교육이나 건물 안전점검 등의 사전조치를 충실히 취한 결과 수십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와중에 칭룽 현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의 실책을 감추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업적에 대해 단 한 마디 언급도 할 수 없었다고... 그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4인방이 언론 등을 장악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지진발생 21시간 뒤에나 언론을 통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시작되었기에 그 만큼 신속한 대응이 어려워졌고 민간적인 차원에서 전국적인 지원이 이루워지기 시작한건 그 이후였기 때문에 피해를 크게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2005년, 장칭저우라는 사람이 양유천과 칭룽 현 관계자 등 지진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아 <탕산경세록>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 정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고, 결국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잊혀지고 말았다. 후에 이 책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얀마이>가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 역시...

여담으로 당시 덩샤오핑 축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사인방의 리더 장칭은 "탕산에서는 겨우 수십만 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덩샤오핑 탄핵은 8억 인민 전체의 문제다"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시전하기도 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