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미남 배우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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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미남 배우 '장국영'


2017. 4. 1.

1980~90년대에 황금기를 누렸던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미남 배우이자 가수. 원래 이름은 張發宗. 한자 표기는 張國榮. 영어로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다.


4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2017년 현재 살아있다면 61세 환갑이다. 손석희, 이영돈과 동갑.


장국영은 '홍콩의 직물왕'이라 불리는 부유한 직물상인 아버지 밑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장국영이 태어나기 전 그의 바로 윗 형인 아홉째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국영은 그 아홉째 자식과 같은 날에 태어났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그를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히치콕도 주문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재단사였지만 사업이 바쁘다며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 외에 둘째 부인도 있었다. 그런 부모의 외면 속에서 누나와 형들에게 치이고 외롭게 자라면서 그를 정성으로 잘 보살펴준 유모를 친부모님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도 이 유모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민감한 데에는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중퇴하고 홍콩으로 귀국 후 1977년 우연히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에서 <American Pie>로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오랜 무명끝에 가수로서는 대성공하였지만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얻고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서극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그 뒤에도 가수와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인터뷰에서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 진압한 것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한 발언과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된다. 홍콩 언론들은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장국영의 팬들 중 한명이 장국영과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알란 탐의 팬과 대립하다가 사망했던 사건을 들먹이면서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고,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진백강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장국영은 1989년에 우리나라의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도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이 해에 토토즐에도 출현해서 《무심수면(無心睡眠, Sleepless Night)》을 불렀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힌 적은 없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만일 남녀 모두 ok라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뭐가 안 좋다는 것인가" 라고 한 발언과 2000년 《타임》지에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등의 발언들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였다. 

공연을 할 때 긴 머리에 여성 전용의 긴 하이힐을 신고 나온 적이 있다. 본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보위라는 인물 자체도 대표적인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 확연하게 동성애다, 양성애다라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치 마이클 잭슨을 소아성애로 왜곡해서 보도했던 미국 언론처럼 그가 인류애적 사랑이 엄청나다는 점을 세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그로 인해 판매부수를 늘린 찌라시 언론사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매염방이 장국영 사후 명보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홍콩의 황색언론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의 성정체성은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한지 오래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보위의 퍼포먼스를 따라 한 것도 그냥 겉모습만 따라한 것일수도 있기에 모호하다. 게다가 보위는 실제 양성애자였던 적은 있으나 젊은 시절 한 때 일이고, 행적을 보면 평생 양성애자로 산 것은 아니다. 말년에는 심지어 "양성애는 음악 활동을 위한 컨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정말 장국영에게 남자 애인이 있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실제로 동성애자였다고 하더라도 세간에 장국영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에 대해서는 장국영 스스로가 그는 자신의 동성 애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2003년 4월 1일, 향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이 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엔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나중에 진실이었음을 알고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는 6명의 팬이 투신하여 5명이 사망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대만의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그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실제로 캐나다 정부에서 홍콩 영화배우들을 삼합회와 연관이 있다며 이민을 거부했다는 루머가 돌 때도 장국영만은 유일하게 이민 허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삼합회가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떤 이유는 그의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젼이었는데, 영화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관련 스탭들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해서 영화를 찍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번복 후 처음 출연한 《가유희사》는 필름탈취를 겪기도 했고, 생전 인터뷰에서 삼합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감독 데뷔를 하려해도 삼합회와 연결돼있는 대다수의 홍콩 영화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계속 제작에 실패했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중국의 사업가인 '석실'에게 투자를 받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으로 그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은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실제로도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다.

경찰은 '장국영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라고 밝혔지만, 이 유서는 2017년 현재까지 전문(全文)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한 호텔은 중간 부분이 튀어 나온 구조라서 정상적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면 호텔 앞에서 시신이 발견돼야 정상이지만 장국영의 시신은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되었다.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큰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작 호텔 현관 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관 도어맨은 아무 소리도 못 들어서 신원이 불분명한 행인이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다.

투신해서 죽은 것 치고는 혈흔이 너무 적었다. 다만 의사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투신해서 죽어도 혈흔이 꼭 많지는 않다고 한다.

24층 정도의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면 보통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인 머리로 떨어지게 되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이 TV에 중계되었을 때 잠시 노출된 장국영의 시신은 머리 부분에 외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논란이 일자 당시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발부터 떨어져서 그렇다고 밝혔다.

사고 당일 장국영이 막화병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그날 장국영에게 두 건의 약속이 더 잡혀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의 매니저였던 진숙분 역시 "장국영은 사망 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라며 보통 자살할 사람의 행적이 아닌 평상시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진숙분은 사망 당일 그가 사망하기 10분 전인 오후 6시 30분에 장국영과 통화했는데, 그는 주차장에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장국영은 차를 주차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24층에 뛰어가서 곧바로 투신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장국영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남자가 실험해봤는데, 주차장에서 지하도를 거쳐서 호텔 입구까지 오는 데만 9분이 걸렸다고 한다.

사건 당일 그의 연인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당학덕의 행적 또한 여러 점에서 의문을 갖게 했다. 장국영 사망 당시 당학덕은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장국영이 사망하던 날 그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그가 말한 시간은 이미 장국영과 매니저가 다른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장국영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국영 사망 며칠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하게 싸우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장국영의 사망 직후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 라고 밝혔고, 2013년 장국영 10주기 추모 콘서트에서 장국영의 매니저였던 '진숙분'이 장국영이 죽기 직전 자신의 입으로 "죽고 싶을 땐 뛰어내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살 이유가 우울증이었다고 하면 의외로 간단해지는데, 자살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끝까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일정이나 다른 것을 자살을 대비해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살 직전까지도 주위 사람이 평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팬들에게는 중국 대륙출신의 사업가 '석실' 이 장국영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자신의 영화 감독 데뷔작인 영화 '투심' 제작에 투자를 약속했지만, 중간에 갑자기 석실이 투자를 중단하여 영화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자 이에 크게 실망한 장국영이 자살을 선택했다라는 정도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당학덕이나 송소천 등 생전 장국영과 친했던 이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다만 상술한 당학덕의 입지 상 일부 미묘한 구석이 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홍루춘상춘(紅樓春上春)》(1977)
《애정고사(愛情故事)》(1977)
《양과여소용녀(楊過與小龍女)》(1982)
《열화청춘(烈火青春))》(1982)
《H2O)》(1984)
《연분(緣扮)》(1984)
《성탄쾌락(聖誕快樂)》(1984)
《위니종정(為你鍾情)》(1985)
《용봉지다성(龍鳳智多星)》(1985)
《영웅본색(英雄本色)》(1986)
《우연(遇緣)》(1986)
《영웅본색 2(英雄本色2)》(1987)
《천녀유혼(倩女幽魂)》(1987)
《연지구(胭脂扣)》(1988)
《살지연(殺之戀)》(1988)
《신최가박당(新最佳拍檔)》(1989)
《천녀유혼 2 인간도(倩女幽魂II人間道)》(1990)
《아비정전 (阿飛正傳)》(1990)
《종횡사해(縱橫四海)》(1991)
《호문야연(豪門夜宴)》(1991)
《가유희사(家有喜事)》(1992)
《시티보이즈(藍江傳之反飛組風雲)》(1992)
《동성서취(東成西就)》(1993)
《백발마녀전 1, 2(白髮魔女傳)》(1993)
《패왕별희(霸王別姬)》(1993)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금지옥엽(金枝玉葉)》(1994)
《야반가성(夜半歌聲)》(1994)
《금옥만당(金玉滿堂)》(1995)
《금지옥엽 2(金枝玉葉 2)》(1996)
《대삼원(大三元)》(1996)
《신 상해탄(新上海灘)》(1996) - TVB 드라마 《상해탄》의 리메이크작
《색정남녀(色情男女)》(1996)
《풍월(風月)》(1996)
《춘광사설(春光乍洩)》(1997) - 국내개봉명 《해피투게더》
《친니친니(安娜瑪德蓮娜)》(1998)
《구성보희(九星報喜)》(1998)
《홍색연인(紅色戀人)》(1998)
《유성어(流星語)》(1999)
《성월동화(星月童話)》(1999)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Buenos Aires Zero Degree)》(2000) - 《해피투게더》 메이킹 필름
《오키나와 랑데뷰(戀戰沖繩)》(2000)
《스피드 4초(倉王)》(2000)
《이도공간(異度空間)》(2002) - 장국영의 최후 유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