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의 무능함으로 개박살난 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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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무능함으로 개박살난 칠천량 해전


2017. 3. 23.

무능한 지휘관이 최정예를 어떻게 말아먹는지 보여주는 전투

이는 현대 시점으로 말하면 전체 해군의 절반, 아니 전체 병력 중 90%가 무능한 장군에 의해서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전멸한 것과도 같다!

임진왜란의 해전. 조선수군이 대패한 굴욕의 전투로 한국 역사상으로도 비슷한 예시조차 없는 황당한 패배. 흔히 인터넷 상에선 용인전투, 쌍령전투, 현리전투와 더불어 한국사 4대 참패로 인식되나, 나머지 세 전투는 아군의 규모만 컸을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규모만 큰 오합지졸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적군에게 전술/전략적으로 와해되거나 모랄빵이나 무너지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꽤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은 당시 최대 규모의 정예군이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쟁에 끼친 영향도 엄청났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와해시킨 수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재건되지 못했고, 하마터면 호남이 뚫리고 적이 서해안을 통해 '해상으로 보급하는' 사태를 낳을 뻔했다. 당시의 조선 수군이라면 공격하라고 명령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전력차에서 원균은 아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학살 당하도록 모든 전략을 틀어버린 것이다.


원균이 최정예 병력을 어떻게 탕진했는지를 요약하면, 휴전기간에 일본군에게 사기쳐서 욕을 먹고, 비무장 수송선을 추격하다가 해류에 병력이 떠내려가고, 병력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개죽음당하게 하고, 함대 150여 척이 적선 60여 척에게 얻어맞다가, 뜬금없이 병력을 막다른 지형에다가 상륙시켜서 전멸당했고 절반만 살아남아 도주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에서 모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순신의 파직, 그 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 으르렁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눈엣가시를 남의 손 빌어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간첩질을 하던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 건너서 온다니깐 빨리 처리해"라는 정보를 흘렸다.


김응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조정에 보고했고, 이 소식을 들은 권율은 조정에 이를 알림과 동시에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해서 바다 건너오는 가토를 잡으라 명령했지만... 권율이 직접 달려와서 한산도에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마침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인해 여수로 가 있었고, 여기에 풍랑이 들어 바로 한산도로 돌아가지 못해 남해도에 있을 때 가토가 도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조정에서 가토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토는 도착해 있는데요' 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은 당연히 이를 이해했다. 물론, 이때까지는 큰 문제 없었다.

이후 조정은 다시 한번 공격 명령을 내렸고, 여기에 이순신은 마찬가지로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까지 가서 일대를 들쑤시고 왔다.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함부로 못 건너올 것이다... 는 이유에서였는데, 이순신은 여기에 복종했다. 물론 이때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월 21일, 선조는 "이순신이라서 못 잡은 것임. 나라면 잡을 수 있었음" 이란 내용으로 원균이 올린 장계를 받아보더니, 이틀 뒤인 23일 갑자기 "그때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가토를 왜 안 잡았냐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맙소사 라면서 뜬금없이 분노하였다. 그 결과 2월 4일, 사헌부에서 선조의 눈치를 보며 이순신 탄핵에 들어가고, 선조는 딱 이틀 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2월 26일,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전임 이순신은 배 134척과 수군병력 17,000여 명,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여분의 총통 300자루 등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넘긴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었고 자신이 혐오하던 이순신을 내쫒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은 "나도 능력 있다능!"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1597년 3월 9일, 조선 수군은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균은 말아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항왜를 보내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 안심시킨 적들을 돌려보내나 싶더니 뒤를 쳤는데 반격한 일본군에게 그만 임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탈취를 당한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는 부록이다. 결국 그 판옥선을 부숴버리고 왜구의 목을 쳐서 장계를 써 올리니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武勇)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論賞)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犒軍)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議啓)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啓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으로 비변사에 말하라." 
<조선왕조실록>

글만 봐도 선조가 흐뭇한 아빠미소를 짓고 있는 게 상상된다

그러나 왜군은 "아직 휴전기간인데 이렇게 뒤통수 치는 게 어딨냐!"라며 항의를 했고, 조선조정은 당황했다. 결국 원균에게 줄 포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대로 이순신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는데,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들어 놓은 조선수군의 작전회의실인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선조는 이를 보고 나서야 이 자의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너 부산 언제 공격할 거냐?"라고 압박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원균은 "저라면 당장 부산포를 때려 부수겠습니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말을 바꿔 "저 혼자서 부산포 공격은 무리고 30만 조선 육군이 안골포, 가덕도를 쳐주시면 제가 부산으로 달려가 적진을 모조리 소탕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원균이 자기 나라 군대의 병력규모를 몰랐을 리는 없고, 현실적으로 부산포 공격이 어려움을 알고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조정에서는 원균에게 병력 5천 명 지원하면서 "나가 싸워라. 안 그럼 뒈진다."라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고 결국 6월 18일, 원균은 조선 함대 100여 척을 이끌고 부산포로 향했으며, 부산포로 가는 길에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안골포에서 적선 두 척을 빼앗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의 저항에 부산포는 콧빼기도 보지 못하고 결국 귀환했다.

조정에서 까라는 부산포는 까지도 못하고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좋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고원균은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결국 선조 30년 7월,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등 지휘관과 조선함대 169척을 이끌고 출전, 7월 7일에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했다. 그리고 7월 8일에 왜군과의 첫번째 교전을 벌였는데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빈 배 8척을 불사르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9일 서생포에서는 일본 수군이 공격하자 겁먹고 도망가다가 판옥선 20여 척 가까이 상실하는 패전도 겪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판옥선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하던 도중 일본 본토에서 오던 수송선단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때 수송선단이 꽁지 빠지게 줄행랑치자 원균은 "이게 웬 떡이냐!"라며 달려들었는데... 판옥선 12척이 해류에 떠내려가버렸다. 물론 이 12척이 그 12척은 아니다.이는 바로 앞의 적선, 그것도 비무장인 적선을 잡겠다고 격군들이 지칠 때까지 뒤쫓았다는 소리다.

원균은 이번 출전에서 (왜군 피해) 10척 : 32척 (조선 수군 피해) 라는 이순신이 지휘관으로 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교환비를 보여주며 한산도로 돌아왔다.

결국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간 무적에 가까웠던 조선 함대가 패퇴해 한산도에 갇혀 있는 상황에 이르자 화가 난 권율은 7월 14일 직접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이때 곤장을 친 이유는 조정을 기만했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권율쯤 되는 지휘관이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다며 무작정 벌을 줬을 리는 없고,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부산포를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막상 자리에 오르고 나니 공격할 생각 없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람을 모함하고 허풍에다가 거짓을 말하는 원균의 사람됨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제2함대 사령관이 장병들 다 보는 앞에서 육군 제7군단 사령관에게 빠따질을 당한 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원균 입장에선 참담한 노릇이었다. 이로 인해 더는 퇴로가 없어진 원균은 결국 부산으로 함대를 끌고 갔고, 부산 가덕도에 도착해 물을 길러 수군 400명 보냈다. 그런데 이들은 가덕도에 위치해 있던 다카하시 나오쓰구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을 당했고 원균은 "이게 뭐시여! 빨리 도망가자!"라며 병사 400명을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버려진 병사들의 운명은 풍비박산....이러한 모습은 원균이 그토록 증오하던 이순신의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이다. 1597년 2월에 있었던 이순신의 부산포 출전 당시 가덕도에 물길러 갔던 조선 수군 5명이 왜병에게 붙잡히자 배 62척 + 김응서의 육군 병력으로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어 위협해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포로들을 풀어주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걸하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원균이 얼마나 무능한 지휘관인지 알 수 있다.

한편 도주한 원균은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쪽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이곳에서 또다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았다. 육지에 진을 치지 못하고 쫓겨난 원균의 조선 수군은 다음날인 7월 15일, 영등포 일대가 비바람이 몰아쳐 더이상 배가 정박하지 못하게 되자 폭풍우를 헤치고 칠천량으로 향했고 그곳에 정박하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조선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전투의 전개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균의 삽질로 병력을 찔끔찔끔 잃다가 "이렇게 된 이상 육지로 도망간다"라는 어이없는 작전이 나오게 되고 그 후 수군이 흩어져 버렸다. 적에게 습격당해서 전멸한 게 아니다.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군세가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없이 그냥 증발한 셈. 이순신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될 것을 숟가락을 얹기는커녕 밥상을 엎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원균이기에 가능한 기적의 미라클. 병력의 수나 질적 면에서도 어택땅만 해도 이길 수 있었다.


7월15일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

칠천량에 진을 친 후 원균은 그때까지의 삽질
경과로 인해 의욕상실 상태가 되어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지켜보다 기회를 눈치채고 칠천량으로 몰려갔다.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육군도 칠천량으로 향했다.

7월 15일 밤 10시, 조선 수군의 군량선에 불이 났다. 이는 일본 수군이 벌인 짓이었는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지휘관인 원균이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주위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7월 15일, 왜장이 날랜 군졸들을 모집해 작은 배를 타고 우리 군사와 함대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 병사들이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포 두발을 발포했다. 우리 군사들은 몹시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적들이 병선을 타고 일거에 진격, 한산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해상록>

7월 16일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 조선 수군, 그리고 불타는 칠천량!!

군량선에 불이 붙은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향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지휘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이 말인즉슨, 일본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었다는 소리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냐면 군대에서 초병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상한 것은, 원균같은 똥별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뚫렸다는 것.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눈물을 뿌리며 이야기한 것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공격으로 당황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여 불리한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반 2척의 배가 기습 공격을 해왔을 때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가 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긴 했으나 지휘권이 가동되기는 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원균은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당연히 기습해온 적선이 단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한다. 이때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2척의 병력이 기습한 이후 본격적으로 참전한 적은 도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요시아키가 창과 포로 무장한 한 척의 거함에 뛰어 올라 몇사람을 참수하자 적(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드디어 배를 빼앗았다. 요시아키는 또 적의 별선에 뛰어오르려 하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다."
<정한휘보>

위와 같이 일본군의 전술은 군선의 돛대를 사다리로 이용해 전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기록상 싸우다가 자결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보통은 자살 행위를 연상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김완의 해소실기에 나온 내용으로, 이를 통해 최소한 전투 초반 지휘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념상 칠천량 해전은, 아래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 칠천량 해역의 전투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받아 조선 수군 전체가 그 자리에서 섬멸당하고 이후 명량해전 때 참전한 판옥선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하였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
<해소실기>

최고지휘관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한산도 근처 춘원포로 도망갔다. 현대의 통영시 광도면 연안으로 추정. 여기서 원균이 지상에 내려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려,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조선 수군을 제대로 교전 한번 해보지 않고 완벽하게 무너뜨렸다.곤장 사건에서 보듯 권율이 그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1만이 채 안되는 조선 육군이 일본군 수만을 막아주리라 본 것부터가 실수다.

차라리 원균이 한산도로 퇴각해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각기 도망치거나 아예 지휘권이 붕괴된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로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균의 지시로 조선 수군을 퇴각조차 할 수 없는 춘원포로 다 몰아 버렸으니. 물론 이 시점에 수군 지휘관들 상당수가 원균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도망쳤기에 절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원균과 함께 전멸당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차라리 원균이 맛이 가서 그냥 군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면 대다수가 무사히 도망쳐 나중에 수습할 여지라도 있었지 원균이 군대의 절반 이상을 춘원포에 꼴아박은 덕에 조선 수군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순신이 엄청난 노력 끝에 만들어 놓은 최정예의 조선 함대와 수군이 그저 왜선 50척이 기습했다고 와해되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1,00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 이들이 춘원포에 고립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나마 본 함대가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삼도수군의 절반 이상이 전장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코 빈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됐고, 이 전쟁의 첫 회전(會戰)인 칠천량 해전은 동년 7월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戰線)이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했다. 한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
조선 수군 함선 169척 중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긴 했으나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했고, 끝까지 편제를 유지해 명량 해전 직전까지 수군에 남은 건 배설이 도망칠 때 끌고 간 12척 정도로 조선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사실, 제대로 된 전투없이 다 도망갔기 때문에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고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노량 해전 당시 이순신이 이끌던 수군 전력을 고려하면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즉 모두 죽었다기 보다는 지휘 체계고 뭐고 모조리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진 것.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적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합류한 전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리고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 경우에는 그나마 명량해전 당시 12척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비난만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명량해전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은 각개격파로 궤멸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망가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운 이도 배설이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유지를 갖고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가치있는 행동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시간상 보면 건조하는 속도로는 그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노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판옥선 83척으로, 명량 해전 이후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잔여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다는 얘기이며(실제로 명량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시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배설의 함대이며,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시 최초로 응전한 것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해전에 참가 안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잡혀와 목이 잘렸다. 단 배설의 도망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은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던 곳이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며,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의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의 진격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해상 보급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대다수가 갓 뽑은 오합지졸 신병들이 아닌 임진왜란부터 약 6년간 왜군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워오고 승리한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장교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다. 한산도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몰살당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받는지 생각해보면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게 이상한 정도. 《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이 말한 것은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온 이가 이순신에게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다만 일본군은 7월 말까지 주변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며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조선일일기>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선조는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라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고 이순신은 원통함과 울분을 뒤로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라고 기술할 정도.

그리고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가 없는 말도 안되는 전투로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패한 조선 수군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원균은 최고의 함대를 가지고 최악의 패배를 했고 이순신은 최악의 함대를 가지고 최고의 승리를 했다.사실상 이 전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명량대첩을 통해 이순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의 대비가 없었다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함선 성능차를 들면서 그 정도 격차가 있으면 이순신이 아니라 어떤 졸장이라도 큰 전공을 세웠을 거다라고 떠드는 개드립퍼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활개쳤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성향보다 구조적 흐름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무 데나 적용하면서 자기가 객관적인 줄 아는 인간들도, 이순신에 대한 존경을 영웅주의 사관쯤으로 취급하며 거기에 한몫했을 것이고. 또다른 이득은 원균이 죽었다는 것 정도?

패배의 원인은 일단 원균 자체의 무능함이 가장 큰 원인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 이 때문인지 원균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밑의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들이 같이 원균을 까는 장면이 자주 나올 정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균의 부하들마저 대놓고 원균을 깠다. 작전 중에도 경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다급해지자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놓고 도망쳤다.

전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대자면,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한 것과, 그 때문에 왜군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한 것,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한 것 정도가 되겠다.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그리고 통제사의 권한보다 체찰사의 힘이 컸다. 권율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통제사는 윗선에서 내린 작전명령에 대해 아무것도 토를 달 수가 없던 상황. 원균 자신도 머리를 쓸 줄은 알았으니 부산포 공격은 무리라는 것을 판단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이 이순신을 모함할 때에는 부산포 공략이 가능하다고 큰소리쳤기에 억지로 끌고 나갔고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한편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라고 명령할 정도로, 본래는 조선 수군을 두려워했다. 해안 지방 곳곳에 왜성을 쌓아 오로지 방어와 최소한의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했을 뿐, 조선 수군과의 정면 충돌은 극구 피했다. 다만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외해로 나가 부산포로 진격해서 싸우는 것은 장수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할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그대로 시행되었다가 처참히 실패한 전투가 바로 칠천량 해전. 이 덕분에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 수군 궤멸의 1등 공신이 되어 버렸다. 전사자가 얼마나 많이 났으면 칠천량 주변 섬에 '혈도(血島)'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