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생애와 정치 그리고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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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생애와 정치 그리고 논란


2017. 2. 13.

[생애]
대한민국의 정치인 원희룡. 2014년 6월부터 제37대 (민선 6기)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로 재임 중이다. 세계지방정부연합 아시아태평양지부(UCLG ASPAC) 대표회장을 겸하고 있다.
1964년 2월 14일 제주도 서귀포(당시 남제주군)에서 14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 집안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은 제주도에서 지내왔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 환경이었으며, 원희룡의 부친은 과자가게, 농약상, 신발가게, 책방 등 여러 사업을 전전했지만 잘 안 되서 빚쟁이들한테 시달린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점을 하다가 관둔 덕에 어려서부터 집 한 켠에 쌓인 재고서적을 원없이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 굴지의 명문고인 제주제일고등학교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치른 12차례의 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며 기대를 모아 오던 중 1982년도 제 1회 대입 학력고사까지 수석을 차지하는 실력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적이 있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가 살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낙후된 곳이었단 점이다. 대도시의 내노라하는 명문가의 학생들이 우수한 인프라 속에서 공부하는 상황에서 원희룡은 과외 한 번 받아보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서 우수한 결과를 얻었다. 전국수석의 단골소감 유행어가 된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라는 말을 최초로 발언한 원조 '공부의 신'으로 불린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진학하면서 "장차 대한민국을 위해 막스 베버와 같은 법사회학자가 되고 싶다" 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1982년 대학진학 이후 신군부 독재의 폭압적 정치현실과 광주 사태의 진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서울대 구내에서 전경들의 여학생 추행사건에 분노하여 항의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호주머니에서 시위 관련 유인물이 발견되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날 밤 훈방 조치가 되긴 했지만 학교로부터 유기정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본격적인 운동권의 길을 가게 된다. 8년동안 야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구로공단, 인천의 금속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서 위장취업을 하여 하루 일당 2900원을 받으며 삶을 살아갔다.

주체사상이 아닌 노동자들 입장에서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야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지만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고 사상적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할 시기에 이르자 사회인으로서 일해보기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법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1990년에 시작해 단 2년밖에 안되는 준비기간동안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하는 역량을 다시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24기)에서 최상위권인 5등의 성적으로 수료했다.

군복무는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자신의 발가락을 인증하며 해명했다. 다섯살 무렵 부모님이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실던 리어카에 올라 타다가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들어가면서 오른발 두 번째 발가락이 거의 절단되었다. 그리고 잘라진 발가락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괴이한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아들이 다치자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했지만, 당시 제주도 중문지역의 낙후된 의료시설로는 제대로 된 진료가 어려워서 결국 기형으로 남게되었다. 사실 원희룡은 발가락 장애 때문에 지체장애인(2급)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 군면제가 가능했던 것. 장애인 군면제라 병역 관련에서는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과거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하여 4년간 금융범죄, 환경범죄, 지능범죄 소탕에 열중하다가 1998년 8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그리고 1999년 당시 젊은 피 수혈에 열을 올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천명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제주도 출신 중에서 중앙권력의 심층부에 도달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제주도민들 사이에서의 명망이 대단히 높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지사로서 제주도내 부동산 투기규제 강화 정책과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자본 투자유치 제동에 전념하고 있다.

취임 이후 그동안 진행 중이던 대규모 투자개발을 대부분 중단하였고. 2017년 1월 현재까지 단 한 건의 신규 외국 자본 투자유치를 받지 않았음에도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제주도 땅 다 팔아먹는다"는 식의 허위사실 유포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반면, 중국 현지 언론으로부터는 "지사가 새로 바뀌니 볜롄(變검·변검)하느냐"며 "한국 행정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 그가 추진 중인 주택난 해소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보급정책과 제주 신공항 건립사업은 입지선정과 관련하여 지역에서 찬반 논란이 뜨겁다. 지역 여론과 민심에 더 민감하게 대처하고 소통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할 듯 하다. 

이외에도 제주 대중교통체계 개편 문제, 쓰레기처리 문제, 하수종말 처리장 시설개선 및 공급 확대 등 지역사회에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아서 "도정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2017년 1월 31일에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정치]

사법고시 합격 이후 검사 및 변호사로서 지내오다가 한나라당의 당내 혁신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의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로 1999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양천구 갑 지역구에 공천되어 새천년민주당 박범진 후보를 꺾고 당선에 성공, 젊은 피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개혁적이고 소신있는 언행들로 유명해졌는데, 미래연대의 주축 멤버로서 보수 일색이던 당 내부에 이 때부터 젊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남경필, 정병국과 함께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소장개혁파 운동을 이끌었고, 당 지도부와 부딪히면서 정치이력을 이어왔다.

2004년 총선 직후에 치러진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박근혜 대표에 이어 2위로 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선출되었고,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는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대통령 경선을 완주하게 된다. 이 때 대통령 경선에서는 떨어졌지만 페이스메이커로서 보수층의 격려와 함께 40대 대권주자로서 신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양천구 갑에서 국회의원 내리 3선에 성공하게 되고, 2009년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당내 쇄신 바람을 주도하였다. 2010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공천심사위원장을 두루 역임했다. 


2011년에는 한국정치의 비정상적인 공천시스템을 개혁하고 선진정치를 위한 선거구 개편 문제를 거론하며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19대 국회의원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배수의 진을 치고 당 대표에 도전했지만 4위로 낙선하게 되어 이에 책임을 지고, 2012년 6월을 끝으로 여의도 중앙정치무대를 떠났다.
현실정치를 떠나 1년여 간 정치적 휴식을 취하며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독일 아데나워재단, 중국 베이징대 등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수학하면서 외국 선진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2013년 말에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2014년 2월에는 NH농협은행카드, KB국민카드, 롯데 카드 등 '금융 3사 고객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자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과 함께 ‘개인정보유출 국민변호인단’을 꾸려 국내 피해자 5만여명을 대리하여 무료 공익소송을 사회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이에 대해서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계획하고 있느냐는 세간의 관심이 있었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새누리당 지도부로부터 '당내 중진차출론'이라는 명목으로 제주도지사 출마를 압박 받게 된다.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자신의 출신지인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에 출마하여 득표율 60%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임기 초반에 "불합리한 도의회의 예산 관행을 타파하겠다"며 제주도의회와 예산안을 두고 갈등을 겪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도의회와 화해하며 서로 소통과 협치를 강조하는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현직 도지사 신분이지만 제주도가 중앙정치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국회의원 시절에 비하면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본인도 대권에 상당한 의욕을 보이는 중이고, 현재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후보로 거론되는 중이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 때문에 힘들다는 평이 대다수. 하지만 젊은 나이인만큼 2022년 대선까지 노릴 수 있는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재 원희룡지사의 플랜은 제주지사로써 행정경험을 쌓은뒤 2020년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컴백한 후 대선에 출마한다는 계획을 짜놓은 상황이다. 

2016년 11월 15일 새누리당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중에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비상시국위 출범으로 분노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남경필, 오세훈, 김문수와 같이 대선주자에서 사퇴하라는 막말을 들었다.

2017년 1월 4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개혁보수신당(가칭)에 입당하였다. 

2017년 1월 31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행정]

1) 카본프리 아일랜드 정책 
국회의원 시절부터 '저탄소녹색성장국민포럼' 대표로서 미세먼지,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문제에 대하여 꾸준한 관심을 의정활동을 통해서 실천해왔다. 도지사 당선이후 "2030년까지 제주도내 탄소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일환으로 화력발전 비중이 컸던 지역 전기공급 체계를 신재생에너지사업(풍력발전, 파력발전, 태양력발전, LNG천연가스 등)으로 교체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독보적으로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전기자동차 구입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혜택을 넓히면서 전기차 충전소 설치 확대 등 제반 인프라 확충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지사 취임 이후 탄소배출 없는 전기자동차 보급확대를 위해 전국 최초로 국산 전기자동차인 쏘울 EV를 관용차로 이용하고 있으며, 제주도에 국제전기자동차엑스포 행사(IEVE 2015)를 개최하는 등 전기자동차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제주도가 전기자동차 보급률과 등록대수로 따져 봤을 때 전국에서 월등히 높은 지역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앞으로 상용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는 지적이 있다.


2) 드림타워 건축허가 전면 재검토
2014년 6월 도지사로 취임할 당시만 해도 2002년 김대중 정부 때 최초로 도입된 '외국인 무비자 입국제도'와 2010년 우근민 전임 제주지사 임기 때 도입된 '외국인 투자이민제'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무분별한 제주 투자붐과 관광객 급증 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었다. 

이에 취임하자 마자 한 달만에 한라산 중산간 인근 지역에 대한 중국인들의 토지 매입을 전면 금지했고, 평화로와 산록도로 위 한라산 방면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드림타워의 층수를 대폭적으로 낮추도록 조치했다. 이는 초고층빌딩인 드림타워가 제주의 자연경관을 가릴 수 있다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사업시행자인 동화투자개발(주)은 56층이던 드림타워를 18개층 낮춰 최종 38층으로 조정하기로 결정했으며, 층수 조정에 따라 218m이던 건물 높이도 168m로 50m 낮아지게 됐다. 콘도(기존 1170실)와 호텔(908실)의 객실수도 각각 320실, 132실 총 452실 줄어들게 되었다.

3) 농지기능관리 강화지침 시행
2010년 전후로 지역개발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농지를 편법 취득해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는 사례가 급증하였고, 투기와 난개발로 인해 농지가 잠식되면서 농지공급과 가격의 왜곡현상이 발생함에 따른 도민의 우려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에 취임 이후 (2015년에) 도내 농지를 전수조사하고 위법 또는 불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농지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를 골자로 한 '제주 농지기능 관리 강화방침'을 마련했다.

부동산 투기목적으로 구입한 농지에 대한 관리가 대폭 강화되었는데, 실제로 자경하지 않으면서 소유하고 있거나 불법으로 농지를 취득한 경우 그리고 토지 분할 매매 적발시 소유 토지를 강제처분토록 하였고. 처분하지 않으면 처분할 때까지 매년 (해마다) 공시지가의 20%에 해당하는 '이행 강제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해당 농지에 대해서는 제주도가 최우선으로 매입하여 도 소유지를 확보하고, 헌법과 농지법상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가 시행된 지 반년도 안 되서 행정 전수조사 및 국정감사 공식 통계자료상 제주도내 중국인 토지 매입량과 자국인 부동산 투기행위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제주도내 전체 토지거래량도 감소세로 접어들고 있어 긍정적 효과를 보고 있다. 투기꾼들만 제외하면 대다수의 도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평가다. 단, 정책효과가 더욱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법망을 피해가는 사각지대가 없도록 세부시행 지침을 더 촘촘하고 치밀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도의회의 지적이 있다.

4) 제주 환상 자전거길 개통
전기자동차 보급장려 정책과 함께 제주의 녹색섬 이미지를 살리고, 지역관광의 양적·질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제주 환상자전거길'을 2015년 11월 7일 개통했다. 사업비 358억 원을 들여 해안도로와 일주도로를 연결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자전거길은 총 234㎞로, 자동차로 서울과 부산까지 가는 거리(456㎞)의 절반을 조금 넘는 거리다.
쇠소깍, 성산일출봉, 송악산 등 제주가 자랑하는 관광 명소는 물론 엉알해변, 한담 해안도로, 신창 풍차 해안도로, 월령 선인장 군락지 등 숨은 명소까지 두루 경유할 수 있다.

5) 공기업 부정청탁자 전원탈락 조치

제주개발공사는 1995년 창립되어 제주도청이 100%출자하고 있는 공기업이기 때문에 제주지사가 인사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도지사 취임 이후 부적절한 관행을 뿌리 뽑고자 공식석상에서 인사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여러차례 강조해왔다. 실제 그는 "인사문제는 정의롭게 가야한다", "지사 이름을 거론하며 외부청탁을 하면 모두 떨어뜨려라"라는 등 인사 혁신의 필요성에 대해 공언한 바 있다. 그 일환에서 현재 개발공사 사장도 지역관료 출신이 아닌 민간기업 출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실제 2016년 5월 경 "제주도내 고용증진을 위해 창업 이래 최대 규모의 공개채용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이후,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공사 임원진을 통해 총 60여건의 인사 부정청탁이 들어왔으나 공정치 못한 경로로 일자리를 청탁했던 60여명은 모두 채용 과정에서 탈락했다. 

더불어 제주도내 공기업 10곳의 특별채용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모든 직원의 채용을 공개채용으로 전환하는 내용으로 내부 규정을 개정하는가 하면, 총 5단계의 전형 과정을 각기 다른 외부 전문기관이 맡아 운영하도록 하는 등 인사시스템 개혁에 주력해왔다.

6) 상수도 유수율 제고 정책
‘2014년 상수도 통계’에 따르면 제주도의 1일 수돗물 생산량은 1억4816만4000톤이다. 이 가운데 42.9%인 6367만8000톤이 누수로 땅속으로 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하루 17만4000톤이 땅속으로 줄줄 새고 있는 것이며 생산원가 기준으로 1억6100만원이 매일 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주지역 유수율이 전국평균(83%)에 비해 턱없이 낮은 이유는 제주도 상하수도본부가 2009년부터 유수율이 43%이라는 점을 알고서도 76% 정도로 통계를 조작해오다가 민선 6기 원희룡 도정이 들어선 이후 행정감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조작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정과 상하수도본부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2021년까지 총 사업비 3934억원을 투입 유수율 제고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논란]

1) 노상방뇨 시비
사법연수원생이던 1994년 9월 15일 밤에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모 가게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다가 이를 나무라는 가게 주인을 폭행하고, 파출소에 연행되자 "사법연수원생을 우습게 보지 말라"라며 파출소 기물을 파손하여 신문 기사에 오른 바 있다.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실제 노상방뇨를 한 것이 아닌데 연행되자 항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으며, "부끄러운 과거로서 두고두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 노무현 탄핵 사태 찬성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건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의 당론이니 이를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탄핵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하자 이를 추진한 지도부를 앞장서서 강력히 비판하였다. 나중에 "노무현 탄핵찬성이 정치적으로 가장 후회되는 행동이었다"는 회고도 하였다. 즉 확실하게 정치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는 판단을 하였으면서도 탄핵 추진 당시에는 이를 당내에서 별로 비판하거나 반대하지않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가 찬성하고서는 나중에 정치적 잘못으로 드러나자 당 지도부의 판단 과오를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3) 전두환 세배 논란
"이제 그만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녹여가야 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연초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세배를 드린 사건이 논란이 되었다. 사실 다음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도 방문하여 세배를 드렸고, '얼었다 녹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황태를 선물하여 화합의 역사를 가진다는 취지로 행했다고는하는데.... 국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결국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의 상처가 아직 너무나 생생하고, 이를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됐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오해를 불러 일으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 국회 기자회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