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땡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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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땡전뉴스"


2017. 1. 2.

전두환 당시, 뉴스 시보를 알리는 9시 종이 "땡~"하고 울리자마자 직후에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뉴스를 내보냈기 때문에 땡전뉴스라고 이름 붙여졌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지 불과 30년도 안되었다. 그만큼 과거에는 대한민국도 북한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시달렸다는 증거다.



한국 언론사의 흑역사. 이 덕분에 명목상으로는 공영방송이던 KBS와 MBC는 5공 때엔 실질적으로는 국영방송의 색채를 띠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특히 보도 프로그램을 본다면) 사실상 국영방송이긴 했다. 

또한 9시 뉴스 시보 후에 주요 뉴스 배경음이 나왔기 때문에 "뚜뚜전 뉴스"라고 하기도 했다. 당시 양 방송사의 땡전뉴스 경쟁이 심해서 KBS에서는 전두환 영상만 취급하는 전용 편집실을 두고, 뉴스 편집 데스크와 청와대 담당 기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계속 땡전뉴스를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경쟁 방송사인 MBC도 땡전 뉴스 전용 편집실을 만들게 되었다. 한편, 어느 날 전두환 동정 영상이 9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않자, 결국 전두환 소식을 MBC 뉴스데스크 첫번째 소식에 담지 못하고 겨우 두번째 소식에 담게 되었는데, 이는 중대한 방송사고로 처리되어 당시 관련 기자는 3개월 감봉과 청와대 출입이 교체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던 1983년 9월 1일자, 소련군이 자국 비행기를 격추시켜 250여명이 사망한 중대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KBS 뉴스 9, MBC 뉴스데스크의 시작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이었다.

이어 전두환이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하는 장면이 비춰졌다. 자국민이 수백 명이 죽었으며 전세계 외신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사건이었지만, 전두환이 조기 청소하는 뉴스가 그날 톱 뉴스로 나온 것.

이러한 행태 덕분에 전두환이 자칭하던 호는 일해(日海)였으나, 항간에서는 전두환의 호가 오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 그리고 전두환의 소식 뒤엔 항상 "또한 이순자 여사는..." 혹은 "한편 이순자 여사께서는.."과 같이 또한/한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영부인 이순자의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당시 이순자의 호가 또한/한편이라는 농담도 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그 당시에는 전두환과 이순자를 9시 탤런트라 비꼬아서 불렀다고 한다. 땡전뉴스가 나왔던 당시 대중가요로 인기 있던 노래 중에 가수 이선희의 'J에게'가 유행이었는데 데모 군중들은 "J~ 아홉시 뉴스에~"로 시작하는 노래마저 불렀을 정도. 그리고 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의 전국 수도 사용량이 최고로 집계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9시 뉴스 초반은 볼 필요가 없으니 이때 주부들이 설거지를 시작하기 때문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땡전 뉴스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 충격과 공포의 동영상을 감상해 보자. MBC에서 제공되는 20년 뉴스 보기에서 1987년 2월-1988년 2월 뉴스데스크 자료를 참고해도 좋다. 단, 전반적으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는 주말뉴스는 권장하지 않는다.


관련 다큐멘터리의 일부 영상이다. 47초에 나오는 영상을 보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면... 참고로 2분 27초 쯤에 저 위의 캡처 화면도 등장한다. KBS의 NHK 표절은 덤이다. 영상 중후반에는 전두환이 가는 곳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맑아진다며 하느님도 전두환을 돕는다고 전두환을 준신격화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1분 45초 자막에서의 友宣(우선)은 友誼(우의)의 잘못. 誼(정분 의)를 宜(마땅할 의)로 잘못 쓴 걸宣(베풀 선)으로 또 잘못썼다. 각하께 상납한다는 영상이었는데 검열 안 당했나 모르겠다. 




MBC 땡전뉴스 모음





1982년 8월 31일 뉴스데스크 영상.





1985년 뉴스데스크의 두 가지 영상. 여기는 시보음이 "뚜 뚜 삐~"가 아니란 점에 유의. 하지만 내용은 영락없는 땡전뉴스다. 아나운서는 이득렬 아나운서.






1986년 KBS 뉴스센터9의 영상. 아나운서는 김광일 아나운서. 변호사 겸 정치인 김광일과는 동명이인.




1982년 KBS 9 뉴스 영상. 남자 아나운서는 최동호 아나운서, 여자 아나운서는 신은경 아나운서.






그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침뉴스에서도 땡전뉴스가 나왔다(1). 1982년 9월 1일자 MBC 뉴스쇼 영상. 뉴스 진행 전에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 모금 관련 안내부터 하는 것이 나왔다. 하지만 첫 소식이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다보니 땡전뉴스이다. 땡전뉴스가 나오는 8월 31일자 뉴스쇼 영상이 또 있지만 전두환 관련 보도진행에서 화면이 잘린 것. 아나운서는 최우철 아나운서. 




그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침뉴스에서도 땡전뉴스가 나왔다. 1985년 여기는 MBC 영상. 왼쪽은 최우철 아나운서, 오른쪽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다.




심지어 작은 규모의 뉴스에서도 땡전뉴스는 나왔다. 1986년 MBC 생활뉴스 영상


실제로 전두환은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허문도를 공보비서관에 임명하여 정책 홍보에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고 자신의 해외 순방 때에도 몇 시간이나 방송 분량을 할양하여 생방송을 하게 하는 등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였다.

특히 각 방송국들은 전두환의 해외 순방 비디오를 개인 소장용으로 따라 만들어 준다던지 전두환이 애청했던 '수사반장' 등의 드라마 녹화 테이프를 손수 조공해 갖다 바치는 등의 행태를 보여, 이 시기 언론이 얼마나 권력에 굴종적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방송사에서 그것도 모자랐는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예 정권홍보성 편파드라마를 15번에 걸쳐서 방영했으며 이는 KBS의 방만한 경영 태도와 가뜩이나 심각한 양 방송사의 편파보도에 불만을 가진 시청자들을 분노시켜 결국 남부지방의 농촌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던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사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이를 막기 위해서 대도시 지역에서도 통합공과금제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편파보도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KBS도 광고 방송을 하고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었다. 신문사에서 전두환을 비판할 수 없어 TV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대신 까던 게 당대 풍토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면서 만화영화도 대부분 외제로 채운 점[15],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외국 드라마도 상당수 편성했던 점 등은 엄연한 사실이었던지라, 반 정부적인 색채를 띠긴 해도 대놓고 잡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KBS가 여전히(정확하게는 88년 상반기까지) 편파적으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청료 징수율이 50%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결국 1984년 1255억원으로 파크를 찍었던 KBS 시청료 수입은 1987년에 1000억원선을 밑돌았고, 1988년 789억원으로 급감했으며 반대로 올림픽, 3저호황의 영향으로 광고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1980년대 후반 KBS 재원구조는 상업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급속히 상업화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텔레비전 수신료가 2500원으로 동결되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직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영훈 사장이 부임해 한동안은 방송민주화, 제작자율화 바람이 불어 공영방송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듯 싶었다. 과거 흑역사를 스스로 반성하는 듯한 방송도 나오고 해서 시청자들이 이제 정신 차렸구나 싶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초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자 서영훈 사장은 바로 쫓겨났다.[17] 그를 대신해 새로 부임한 서기원 사장 하에서 이전처럼 특정 정권에 기생하는 국영방송과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공영 방송으로서의 명분을 다시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홍두표 사장하에서 보도국에 대대적인 쇄신을 가하고 1TV 광고를 폐지하고 나서야 겨우 나아졌다.

그리고 이런 과거는 2010년대 현재까지도 시청자들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가장 큰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기형적 재무구조, 비효율적인 인건비 지출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정권에 기생하는 더러운 놈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가장 결정타로 작용하고 있다. 웬만한 시청자들은 이런 전력이 있는 방송사를 믿을 리가 없으니 "내가 뭘 믿고 니들한테 돈을 더 줘?", "그렇게 돈이 부족하다면 1TV 광고를 다시 하면 될 거 아냐?"라는 논리로 나오면, KBS 측은 반박할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 

의외지만 한동안 MBC에서 땡전뉴스를 방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1982년 6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직에서 MBC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웅희가 전두환에게 TV뉴스 맨 앞에 항상 대통령이 나가는 걸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설득했는데 의외로 전두환도 이에 수긍은 해서 MBC에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난 1983년 경, 참모진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뀐 전두환은 이웅희를 부른 다음에 열심히 갈궜고 결국 MBC에서 다시 땡전뉴스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KBS 2TV에선 1TV에서 방영되는 땡전뉴스와 시간대가 겹치던 "생방송 오늘" 이 땡전뉴스를 피하려던 시청자들 덕분에 시청률이 높게 나왔는데 당시 윗선에서 두번째 꼭지 부분을 재미 없게 해달라는 요구에 진짜로 두번째 꼭지 부분을 일부러 재미없게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1987년 상반기에 아예 폐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뭐,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던 시기였으니...

다만 의외로 일요일만큼은 땡전뉴스가 잘 방영되지는 않았는데 이때 KBS와 MBC에서 평일뉴스와 별개로 심층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파노라마-MBC 뉴스센터를 편성했기 때문. 하지만 충성 경쟁은 어쩔 수 없었는지 1984년 MBC에서 뉴스센터를 뉴스데스크로 통합시켰고, 동시기 KBS1에선 뉴스 파노라마를 8시로 옮기고 기존 뉴스 파노라마가 편성되던 시간대에 KBS 뉴스센터 9를 방영한 바 있다. 다만 KBS에선 1986년에 어찌된 모양인지 몰라도 다시 뉴스 파노라마를 복구 시켜놨다. 그러나 MBC에서 방영된 뉴스센터는 전두환 집권 기간이 끝난 1989년이 되어서야 부활했다.

후일담 아닌 후일담으로 1988년 4월 중순부터 1996년 9월까지는 KBS 뉴스 9와 뉴스데스크에선 주요 뉴스를 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고 SBS도 비슷하게 평일 메인 뉴스도 마찬가지로 주요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그래서 당시 KBS 뉴스 9과 MBC 뉴스데스크 자료를 보면 "오늘의 주요 뉴스" 부분이 없었던 것. 후발주자인 SBS는 1994년부터 KBS 뉴스비전과의 경쟁으로 주요뉴스부분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개편때마다 사라졌다 재도입되었다를 반복하다 1997년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일색의 뉴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KBS나 MBC와 같이 정부의 입김이 강한 방송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언론 매체가 국가중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그에 따른 대통령의 행보를 위주로 편성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땡전뉴스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인 인식의 유산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물론 대통령은 분명 그 자체가 하나의 헌법 기관으로서 기능하기도 하고, 대통령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여러 정치적인 사건들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가므로 이런 행보들은 언론에 보도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대통령 개인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시민의 하나일 뿐이므로 뉴스는 어디까지나 사건과 사실들을 중심으로 보도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언론들도 땡전뉴스를 반면교사 삼아 언론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과거의 흑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