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담배 예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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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담배 예찬론


2016. 8. 8.

최초로 안경을 쓴 국왕이자 ‘골초’이기도 했다. 노론 등과의 대립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담배로 풀었다는 것. 술은 멀리했지만, 한번 마시면 폭음을 했다고 전해집니다.‘불취무귀(不醉無歸)’. 같이 술을 마신 신하에게 대취하지 않았으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음식이 남으면 싸서 신하들에게 줄 만큼 자상한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그의 효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어버이를 미워하지 않으며,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은 감히 남의 어버이를 업신여기지 않는 법이다.”
정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어머니 집안과 아버지의 갈등 등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담배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정조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권6"
담배의 별칭인 ‘남령초’에 대한 예찬.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기호품은 없었으나 오직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연구하고 탐닉하느라 마음과 몸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에 책속에서 생긴 병이 마침내 가슴속에 항시 막혀 있어서 혹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즉위한 이래로는 책을 읽던 버릇이 일체 정무로까지 옮겨져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복용한 빈랑나무 열매와 쥐눈이 콩만도 근이나 포대로 계산하여야 할 정도였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만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추고(推敲)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중국사람은 남령초라고 부르고, 동방 사람은 남초라고 부르며, 민인(지금의 중국 푸젠성 주변에 살던 야만인)은 연엽이라고 부른다. 또한 박물가들은 연다라고 하기도 하고 연초라고 하기도 하는데 어느것으로 정확한 명칭을 삼아야 할까? 당초에는 이 풀의 설질이 술을 깨게 하고 기분을 안정시킨다고 하여 죽통에 넣고 불을 붙여 연기를 흡입하여 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효험이 있었으나 독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가벼이 시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그 효능을 알아낸 자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간장을 억제하고 비위를 도우며 마비증세를 없애고 습담을 제거하니, 사람에게 유익함은 있어도 실제로 독은 없다고 하였다. 점차 세상에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 한 필과 남초 한 근을 바꾸기도 하며,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재배하고 사람마다 효험을 보고 있는 데 금지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쓰임에 유용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말하자면 차나 술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담배 예찬론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