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지배한 정치가 판관 포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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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지배한 정치가 판관 포청천


2015. 3. 8.

포청천(包靑天: 999~1062)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여주(廬州) 합비(合肥: 지금의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경동(京東)·섬서(陝西)·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지간원(知諫院), 영주(瀛州)·양주(揚州)·여주(廬州)·지주(池州)·강녕(江寧)·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 및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가우(嘉祐) 6년(1061)에는 관직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


1062년에 포증은 향년 64세로 병사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다시 그를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숙(孝肅)"이라 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집으로는 ≪포증집(包拯集)≫≪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 등이 있다.


포증(包拯)은 전기적인 인물로 남송(南宋)과 금대(金代)에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 등이 출현하였으며, 원대(元代)에는 포공희(包公戱), 포공전설(包公傳說), 설서화본(說書話本), 소설 등에서 포공을 찬양한 작품이 매우 성행하였다.


명대에는 각종 전기(傳奇) 지방희(地方戱)와 수백권에 이르는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대에는 다시 ≪용도공안(龍圖公案)≫≪삼협오의(三俠五義)≫≪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지방희는 물론 희곡과 소설 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포공(包公)」극집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이로써 포증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청백리(淸白吏)의 전형적인 인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북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 포증은 전통적인 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송왕조의 하급관리였다.


북송 인종(仁宗) 천성(天聖) 5년(1027), 포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으나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몇 년 후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자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으며, 그후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1037), 그는 천장현(天長縣: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의 지현에 임명되었다. 약 40여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역사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그가 천장현 지현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 현에 특이한 소송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어떤 농민이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어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 농민이 소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누군가에 의해 소의 혀가 잘려있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 농민은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를 하고, 포증에게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포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농민에게, "일단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여 팔아버리게."라고 하였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소는 개인이 임의로 도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관청에서 소를 도살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그 소를 도살하였다.


다음날 어떤 사람이 천장현 관청으로 찾아와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포증은 자세한 내막을 물어본 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정말 대담한 놈이로구나. 네가 남의 소 혀를 잘라놓고 도리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그 사람을 고발하다니!"



그 사람은 갑작스런 포증의 호통에 할말을 잊고 멍하니 있다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죄행을 사실대로 인정하였다. 사실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은 그 농민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소의 혀를 자른 다음에 다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판결에 대한 명성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증은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 그후 그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간관(諫官)을 역임하면서 인종에게 불법을 저지른 관료들을 막기 위한 많은 시책들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范仲淹)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 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嘉祐) 원년(1056) 12월,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인종(仁宗)은 개봉(開封)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전에는 그 누구도 그 직책을 맡고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 이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대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 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곤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 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상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거기에 화원과 누각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 위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 철거 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들은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후 개봉부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이다."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 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사생활은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민간에는 포공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패한 권세가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들과 포공의 재판을 다룬 희곡·소설 등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비록 그것들 중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거기에는 청백리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이 반영되어 있다.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세력을 척결한 것은 포증의 일생 중 가장 돋보이고 가장 칭송을 받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포공희(包公戱)가 많다. 희곡 속에서는 청백리 포증의 형상 뿐만 아니라 장룡(張龍)·조호(趙虎)·왕조(王朝)·마한(馬漢)·공손선생(公孫先生)·남협전소(南俠展昭)의 형상도 소조하였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포증을 도우면서 부정을 저지른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은 물론 모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포공은 항상 손에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성지와도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 음양경(陰陽境) 앞에서는 염라대왕도 물러나야 하고 어떠한 요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민중들이 창조해 낸 것으로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근거없이 날조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증은 30여년의 재임 시절에 관직을 박탈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의법처리한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기드문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민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종교적인 "하느님"과는 다르다. 즉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신으로 변화된 "인신(人神)"인 것이다.

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한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에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재판의 종류와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