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남대문'이 국보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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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남대문'이 국보인 이유


2014. 9. 23.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위치한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성문인 남대문

왜 남대문이 국보 제1호가 됐을까? 우선 1호, 2호하는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그러나 동대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남대문이 국보로 지정된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출입문으로 대문(大門)  4개와 소문(小門) 
4개가 세워졌다. 대문으로 동쪽은 흥인지문(興人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을 두었으며,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水口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을 두었다.

이러한 많은 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뿐이다. 특히 남대문은 1395년에 세워졌고, 동대문은 1396년에 완성되어 남대문이 동대문보다 1년 먼저 앞섰다. 또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대문 가운데에서도 남대문은 정문(正門)으로서 동대문보다 그 중요성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 높았다. 또한 건축 기술면에서도 남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동대문보다 크다고 한다.

일명 숭례문이라고도 불리운 남대문. 일제가 우리 문화를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단순히 방향을 지칭하는 뜻의 남대문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에 남대문이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의 여론까지 대두된 적이 있다. 어쨌든 남대문이 문화재 가운데 가장 가치가 크다고 인정하여 제1호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남대문은 1396년(태조5)에 축조되어 1398년 2월에 준공되었으며 그 뒤 1447년(세종 29)에 개수공사가 있었고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한국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숭례문이라고 쓴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 쓰임인데 반해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여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