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클레오파트라. 그는 유명할 뿐 아니라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묘사들은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뭇 남성들을 유혹하는 방탕한 요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선입견을 버리면 또 다른 클레오파트라가 보이기 시작한다. 평생 두 남성만을 사랑했으며 자신이 세운 원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던 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인생.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으로 기원전 30년 39세의 나이에 죽은 클레오파트라는 타락과 교활함과 함께 이국적인 외모로 유명하다. 심한 매부리코에다 큰 입을 가진 그녀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균형잡힌 몸매와 뛰어난 화장술, 우아한 자태, 그리고 천사같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성욕은 역사상 어느 여인보다 뛰어나 하룻밤에 100명 이상의 로마 귀족을 상대로 변태적인 성행위를 한 날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96년 7월13일자. 설현욱<의학전문가 >)
이 정도의 내용이면 명예훼손에 걸리지 않을까.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핏줄은 모두 옥타비아누스측에 살해되어 소송을 걸 만한 친족은 남아 있지 않으니 법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동아일보”의 성의학 코너에 ‘성욕과잉증’이란 제목으로 실린 칼럼의 일부다. 하룻밤에 100명의 남자와 상대. 이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역사 상식이 이른바 의학의 이름으로 실린다. 도대체 어떤 역사서에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실려 있을까?
역사인물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인 기록에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머리속에 담긴 오해와 편견 속에 자리잡기 쉬운 모양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이른바 권위자의 시각과 서술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얼굴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파스칼의 유명한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소한 일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로 쓰이는 이 말을 해석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코가 낮아 미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로마의 권력자들을 유혹하지 못했다면 세계지도가 달리 그려졌을 것’이란 말이 될 것이다. 곧클레오파트라=미인=요부(미로 남자를 낚아채는)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에 의하면 세익스피어는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현대의 영국 작가 버나드 쇼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백인 장군에게 반해버린 황색인 미녀”로 치부해 버렸다. 두 작가 모두 “클레오파트라를 능력과 미모를 갖춘 여왕이라기보다 사랑의 마녀나 복수의 악녀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왕이나 여제는 남성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였던 이유도 컸을 것이다.
신라의 선덕, 진덕여왕 등도 권력장악에 다른 남자 왕들보다 배 이상 힘을 들여야 했다. 측천무후는 역사의 괴물로 낙인찍혀 있을 뿐이다. 여자라는 것에 덧붙여 클레오파트라는 2,000년 역사 동안 서구에 지배받아온 동양의 왕이었다. 피지배민족의 왕이었다는 것이 무한정의 오해와 편견 속에 놓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오해와 의혹에 대해 그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그를 만났다.
악티움해전에서의 패배, 그후 그를 만난 것은 기원전 30년 8월초였다. 그가 평생을 살았던 왕궁에서였다. 1년전 9월2일 악티움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바로 얼마 전인 8월1일에는 재기불능의 안토니우스군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이닥친 옥타비아누스군에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한 채 격멸당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클레오파트라 역시 자살을 시도했으나 옥타비아누스군의 프로쿨레이우스에게 그마저 저지당하고 농성장이던 신전에서 끌려나와 왕궁에 유폐되었던 바로 그때다. 며칠 뒤면 로마로 개선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전승물로 끌려갈 처지였다. 그는 며칠 전만 해도 굶어 죽을 작정까지 했지만 이집트에 남아 있는 자식들을 ‘수치스럽게’ 죽이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협박으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패배의 기운이 흘러서인가, 그 화려한 왕궁의 여왕 처소는 고즈넉했다. 그의 충실한 시녀 카르미온이 옆에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무념의 얼굴로 창밖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가 스며들 듯 곁으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클레오파트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길을 주었다.
“누구냐? 로마로 갈 날은 아직 남아 있지 않느냐?”
클레오파트라는 적의 전승물로 조롱받으며 끌려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고, 이것만은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타인의 방문에 이런 반응부터 보이는가 싶었다.
“아닙니다. 저는 동쪽 끝나라에서 온 2,000년 뒤의 사관(史官)입니다. 여왕 전하의 육성을 들어 후세에 전하고자 왔습니다. 접견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집트인은 영생불멸을 믿어서인지 그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흔쾌히 허락했다. 생각해 보니 그 역시 역사에는 해박하지 않았던가. 당대 최고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를 통독했던 그였다. 이집트 역사를 꿰뚫고 있어 옛 파라오들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그가 아니었나. 클레오파트라 역시 자신의 육성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까지 유혹하려 했는가
“그래, 뭘 듣고 싶어요?” ―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제 모든 것은 가버렸는데…. 미련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네요. 내 남편 안토니우스도 묻어 주었으니 더 바랄 것은 없어요. 단지 내 동생 아르시노에가 당했던, 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것만은 정말 못견딜 거예요.”
― 후세 사람들 중 특히 디온 카시우스(옥타비아누스의 전기작가) 같은 사람은 여왕께서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해 다시 한번 재기를 도모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그랬습니까?
“패배한 사람 뒤에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바로 며칠 전 내 품 안에서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봤는데 살아서 얼마나 더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잔혹하기 이를 데 없고, 내 자식을 수치스럽게 죽이겠다는… 그런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인물에게 어떻게 그런….”
이 대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상당히 어이없어 했다. 사실 전쟁에서의 패배와 신전에서의 농성, 그리고 장례를 전후해 심신이 피폐해진 서른아홉살의 여인이 서른두살의 한창 젊은 권력자를 유혹한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를 희대의 요부로 만들고 싶어했던 승자편의 불결한 상상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한편 로마쪽 사가들은 이런 상상의 한 근거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몰락하게 만든 ‘악티움해전’에서의 그의 전투중 도주를 말하기도 한다.
― 여왕께서는 악티움해전에서 가장 먼저 뱃머리를 돌려 도주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패배가 뻔한 싸움을 보고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배신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배신이라고요? 악티움해전에서의 우리의 목표는 탈출이었어요.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아그리파 장군이 에토네에 있는 우리 해군기지를 점령해 우리의 군수품 보급로를 끊어버려 물자 보급이 힘들었던 데다 우리 기지에는 전염병이 돌아 숱한 병사들이 탈영하는 상황이었죠. 배는 800척이나 있었지만 노 저을 병사가 부족해 230척만 남겨놓고 다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훗날을 기약하자고 했어요. 안토니우스하고도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군자금이 될 보물도 모두 배에 실었죠. 그런데 싸움이 벌어진 뒤 퇴각해야 할 우리 함대가 아그리파의 작전에 걸려 공연히 뒤쫓다 기습당한 거예요. 예상 이상으로 피해가 컸고, 안토니우스도 죽은 부하들 때문에 괴로워했죠. 그래도 배가 100여척은 남았고, 군자금도 충분했어요. 그래서 배를 홍해쪽으로 옮겨 뒷날을 도모한 거예요.”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첩이었나 악티움해전을 고비로 안토니우스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꽃줄로 장식한 그의 배는 승리의 찬가를 울리며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속하게 반역의 혐의가 있는 모든 사람을 처형했고, 재산을 압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부를 모으고 레반트와의 동맹관계를 다져 함대와 군대를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거의 종료된 시점이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할 때 그는 로마에 머물러 있었다. 카이사르와 사이에서 난 아들 케사리온과 함께였다. ‘작은 카이사르’란 뜻인 케사리온이 카이사르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될 것을 클레오파트라는 기대하지 않았을까? 물론 카이사르의 부인 칼푸르니아가 있었고 로마가 1부1처제를 택하고 있어 정식 혼인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유일한 자식은 케사리온 뿐이었다. 그러나 공개된 유언장에는 후계자로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지명돼 있었다.
“로마인이야기”의 저자로 카이사르의 열렬한 팬인 시오노 나나미는 이 대목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여자로서 대단한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클레오파트라를 위대한 카이사르의 속뜻도 모르고 혼자 좋아한 여자로 평가하면서.
― 후세의 역사가인 시오노 나나미는 여왕께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여자로서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단언하던데, 그 당시 어땠습니까?
“조금 실망은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외국인을 후계자로 삼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유서도 당시에는 아침 저녁으로 쓰기도 하고…. 마침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할 때여서 칼푸르니아의 아버지인 피소가 그런 방향으로 유도했다고 나를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러나 그때는 정국이 어수선해 우선 이집트로 돌아오는 것이 급했죠. 이집트에서의 사정도 좋지만은 않았고요.”
재작년 독일에서 출간된 마리아 레지너 카이저의 소설 “이집트 제국의 여왕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 아르시노에야말로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싸워 이집트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 소설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처음 이집트에 진주해 클레오파트라 형제의 왕권분쟁을 해소했던 시기에 로마군은 식량 수탈을 자행하면서 이집트 백성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이때 백성들은 이에 맞섰던 아르시노에를 진정한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새로운 시각이다. 소설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이런 동생이 두려워 안토니우스를 적극적으로 유혹해 아르시노에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돌아왔을 때 동생 아르시노에와 죽은 왕 프톨레마이오스13세를 참칭하는 가짜 왕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려 제압하고 동생을 죽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 이집트로 돌아와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려 동생 아르시노에를 죽인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아르시노에야말로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아르시노에가 독립운동을 했다고요? 그 아이는 틈만 나면 왕위를 노렸어요. 심지어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지를 거슬러 군부, 관료들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대책도 없이요. 그가 일으킨 군사가 2만5,000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용병인 부대로 로마로부터 완전 독립? 그럴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 이집트에 고립된 카이사르를 공격해 괴멸시킨 다음 로마의 실력자와 관계를 맺으려 했겠죠.
독립하려고 했다면 밑에서부터 달리 준비해야 했을 거예요. 나는 로마의 장군인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들어 함께 동서제국을 세우려 했죠. 그런데 로마란 나라가 영토와 인구,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어떤 저력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카이사르와 있었을 때는 그게 안보였는데, 빈틈이 많은 안토니우스와 있을 때 그것을 절감했죠. 카이사르였다면 파르티아를 정벌한 뒤 이런 제국을 건설할 힘이 있었겠지만 안토니우스는 무리였어요. 사정이 이런데 아르시아노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민심을 휘저어 놓는 선동적인 말에 불과했어요. 게다가 처음 쿠데타 때는 나와 카이사르의 목숨까지 위협했지만 그때는 살려줬습니다. 죽이는 것이 관습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돌아온 나에게 가짜 동생을 내세워 칼을 세우다니 …. 후환을 없애야 통치가 이뤄져요.”
부모 형제간의 살육이 끊이지 않았던 이집트 왕가의 비정함이 클레오파트라에게서도 엿보였다. 로마에서 함께 돌아온 그의 명목상의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14세 역시 그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에 대한 거침없는 인물평
기록을 보면 그가 종종 안토니우스를 무시하고 독단을 내세우거나, 그를 휘어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 안토니우스는 어땠습니까?
“천생 2인자로 있어야 행복했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와도 살아 봤으니 그게 더 잘 눈에 띄죠. 그런 사실을 표내면 그 사람 자존심이 상할까봐 조심도 하고 그랬죠. 전쟁을 준비할 때는 그렇게 열심인 사람이고 굉장히 잘 해내는데, 그런 국면이 지나가면 사람이 묘하게 풀려요. 전체를 보는 시야도 좁고요. 상황을 만들어 가지 못하니 조금 절망적이다 싶으면 스스로 방기해 버려요.
잔뜩 술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이번 패전만 해도 그래요. 우리가 처음에 실수를 했어요. 해군기지를 빼앗겨 군수물자 보급로도 끊기고, 병사들 사기도 떨어지기도 했지요. 그 좋은 악티움곶은 함정이 돼버렸고. 그렇더라도 차선책을 세우고 빨리 상황에 대처했어야죠. 우리는 탈출을 목표로 악티움해전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전력손실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것 아녜요? 그런데 거기에 집착해 우울증에 빠지고, 술만 마셔대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죠. 카이사르도 얼마나 많이 패배를 당했습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절망하지 않았어요. 처음 이집트에 들어왔을 때도 군사는 불과 4,000명뿐이었죠. 그때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정면으로 민중을 설득해 무사히 주둔했고, 그 뒤 아르시노에와 환관 포르티에가 2만 4,000명의 병력으로 일으킨 알렉산드리아전쟁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고 그러면서도 유쾌하고….”
― 여왕께서 안토니우스를 졸라 로마에서 정숙하기로 평판이 난 옥타비아와 이혼을 부추긴 것, 아르메니아전쟁이 끝난 뒤 이집트에서 개선식을 한 것, 그리고 주변의 영토 분할을 여왕의 자식들에게 한 것. 대체로 이런 것들 때문에 로마의 민심이 완전히 돌아선 것으로 사람들은 보는데…. 전반적으로 여왕께서 무리수를 둔 것 아닙니까?
뼈아픈 질문이었나? 클레오파트라는 잠시 말문을 닫고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후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1부1처제를 요구하는 로마에 다시 안토니우스를 빼앗겨야 하나요? 그건 카이사르 하나로 족하지 않나요?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사람을 부인이 있는 로마로 돌아가 개선식을 치르게 해야 했나요? 카이사르와 적자 자리를 다투는 옥타비아누스의 칼날이 번득이는 로마 거리로 내가 갈 수 있나요? 더구나 카이사르의 아들 카리시온과 함께 말입니다. 내 병사, 내 물자를 들여 정복한 나라를 정복자 남편과 나누는 것이 잘못인가요?”
역사에서 가정은, 평가는 정말 쓸 데 없다. 그의 말대로 또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파트너는 카이사르와는 몇 급수 능력차이가 나는 안토니우스 아니던가. 그 안토니우스는 수년전 로마로 돌아간 뒤에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까맣게 잊고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까지 했던 인물 아닌가. 회임한 여자에게 그 이상의 치명적인 상처가 또 있을까.
비극적이게도 클레오파트라로서는 3두 중 안토니우스가 선택 가능한 최고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열아홉살의 연약하고, 군사적으로도 무능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당시 로마의 중론이기도 했다. 더구나 로마의 삼두체제 가운데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지방을 선택한 인물은 안토니우스였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로서는 선택가능한 카드는 안토니우스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2인자로서의 그것일 뿐이었다. 그것을 넘어서고자 클레오파트라는 여러 수를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패배는 역사의 결과였다.
로마라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제국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왕으로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나라는 세계 최대의 부국이었지만 정치력과 군사력에서는 로마에게 비교할 수 없는 약소국이었다. 부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정치적, 군사적 저력의 부족이란 비전을 스스로 창출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권력자의 첩이라는 자리에 만족하며, 안정된 속국의 길을 택해야 했을까. 클레오파트라의 정치학은 독립과 식민, 이렇듯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난제가 아니었을까. 너무 무거운 얘기만 오갔기에 조금은 가벼운,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마지막 키가 될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 후세 사람들은 여왕을 ‘미모와 성적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졌던 요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 사로잡았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관께서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내가 여성으로서의 매력만으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고요? 내가 두 사람을 성적으로 홀려 내편으로 만들고 왕위를 지켰다? 두 사람을 이용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그랬다면 그분들과 끝까지 같이 가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분들을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어요. 합법적 결혼이라고는 열살 된 친동생들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또 누구를 선택할 수 있죠. 이런 결혼 틀을 넘어 친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중재해 줄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그 분들은 물론 왕으로서의 내 지위를 지켜주고 기반도 마련해 주었어요. 그리고 내 의지대로 행동할 자유도 얻었어요. 대신 나는 두분이 원정을 떠나고, 로마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병사와 재물을 모두 주었어요. 그리고 그 두 사람과는 부부로서 맺어졌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싶었고, 또 받았어요. 부부가 재산을, 권력을 나누는 것이 왜 이상하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권력자가 이런 것들을 나누는 것이 뭐가 이상하죠?”
플루타루코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헌신적으로 했다. 그는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랑을 바쳤다. 그는 미워할 때 정열적으로 증오했다. 그는 슬퍼할 때 온 마음을 다해 비탄에 빠졌다. 그의 마지막 자기 변호 역시 격정적인 자기 인생의 옹호였다. 그 옹호의 앞과 뒤에는 또 다른 진실과 편견, 그리고 오해의 시각이 가로놓일 것이다. 역사는 산 자의 몫이다.
역사상식 / 클레오파트라는 누구인가.
大제국 로마에 맞서 투쟁과 타협의 시대를 살다 간 여인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왕가의 2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12세는 서자였으나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가 특유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히 왕위를 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10세의 적자인 11세가 왕가의 권력쟁투 와중에 부부 모두 암살당했던 것이다.
취약한 기반에서 집권한 프톨레마이오스12세는 당시 이집트를 분열시키던 난제를 해결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방탕만을 일삼았다. 결국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장녀와 차녀가 왕위를 넘겨받았지만 로마의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은 아버지의 복귀로 두 딸은 살해되고 클레오파트라가 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13세와 함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의 비정함을 몸에 익히지 않을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왕권 확립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는 아들과 딸이 공동으로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그 역시 제왕학을 수업했다. 그리스문화의 전통을 이은 이집트 왕가였기에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유리피데스의 비극, 메난드로스의 희극,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 등 그리스 문학 전반을 배웠다. 과학교육으로는 대수와 기하, 천문학과 의학 수업을 받았고 예능교육으로 그림 그리는 법, 노래하는 법, 현악기 연주법, 승마까지 배웠다. 그는 학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유명한 대수·기하학 전문가인 포틴이 자신의 저서 제목을 “클레오파트라 법전”이라고까지 붙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재능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외국어에 있었다.
그는 라지드 왕가에서 최초로 이집트 민중의 언어인 이집트어를 할 줄 아는 최초이자 최후의 통치자였다.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그의 혀는 마치 각기 다른 음을 내는 여러 개의 악기와도 같다.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다. 통역사의 도움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였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에티오피아어·아랍어·헤브루어·라틴어·시리아어·메디아어·파르티아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 중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했는데, 이런 외국어 실력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기원전 51년, 18살이었던 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어 열살이 갓 넘은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면서 그가 해야 할 정치적 과제는 대단히 많았다. 무능한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관료정치가 나라를 마비시키고 있어 왕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즉위한 바로 다음해에는 유래없는 흉작으로 굶주린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산적떼로 인해 농촌이 황폐해졌으며 이집트 화폐의 가치가 급락했다. 외교적으로도 독립국 이집트가 차츰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관료들과 그의 여동생 아르시노에는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즉위한 동생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관 포틴, 국방장관 아킬라스, 훈육관 테오도투스 등의 사주를 받을 정도로 권력기반은 취약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이집트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금화 가치를 3분의1로 격하시켜 수출증대를 도모하고 의무공채를 발행했다. 또한 막대한 토지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사제 계급과 함께 토착 이집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로운 종교정책을 펼치는 등 정치안정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환관 포틴 등 쿠데타 세력의 발호로 기원전 48년초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 근처 이집트의 동쪽 국경선 부근에 있는 아랍의 속국들로 피신해야 했다.
그 뒤 용병을 고용해 왕권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전쟁의 여파가 이집트에 미쳤다. 전쟁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군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와 쿠데타 세력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그 뒤 이집트로 들어온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면서 새로운 국면이 조성됐다.
카이사르는 형제간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양쪽 진영을 모두 불러들였다. 그러나 아르시노에 쪽이 장악한 궁으로 들어가기에는 클레오파트라로서는 너무나 위험했다.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융단에 쌓여 궁으로 잠입해야 했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극적인 회동 장면이 여기서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아르시노에 쪽은 공동정권에 반발하면서 카이사르쪽과의 알렉산드리아전쟁을 벌이지만 패배한다. 2만5,000명의 병력으로 4,000명의 카이사르군에게 패배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전쟁중에 죽고 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14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즉위하게 되었다.
그 뒤 2년간 그는 카이사르와 부부생활을 하면서 아들 케사리온을 낳았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고, 그 2년 뒤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 등 3명의 실력자가 로마세계를 삼등분해 통치하는 3두정치 시대가 열렸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방을 맡은 카이사르 진영의 2인자였던 안토니우스와 재회하면서 새로운 사랑 끝에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았다. 당연히 정치적 연대가 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받아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파르티아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뒤이은 아르메니아 원정에서는 승리하고 정복지인 시리아·키프로스·아르메니아·리비아 등을 클레오파트라쪽에 할양한다. 클레오파트라가 꿈꾸었던 동서방제국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할양이 로마인을 분노에 들끓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안토니우스와 로마에 둔 부인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의 이혼, 그리고 자신의 무덤을 이집트에 만들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 공개였다. 그 뒤 로마와 이집트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었다. 이집트와 로마의 운명을 건 기원전 31년의 악티움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군은 옥타비아누스군에 참패했다. 이듬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그는 마지막 이집트왕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39년의 격정에 찬 개인사였고,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