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전 총통 장제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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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전 총통 장제스의 생애


2018. 4. 2.

장제스의 생애

어렸을 때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아명은 상서로운 시작이란 뜻의 뤼위안(서원 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 본명 지청(志淸). 그리고 존경의 의미로 선총통 장공(先總統 蔣公) 그래서 대만에서 F-5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할 때 별명을 중정호라고 붙였다.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장제스는 주공단의 3자 백령(白齡)의 후손이며 저장성 펑화현으로 이주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17세기에 장제스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곳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는데 명, 청 교체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된 듯하다. 그의 아버지 장지총(蔣肇聰)은 태평천국의 난 시기에 가산을 모두 소실했음에도 가업인 소금 도매업으로 몇 년 만에 재기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제스는 1894년 12월,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로 삼촌들의 농간으로 인해 유산을 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부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10살 때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장제스 일가에 대한 부패한 관료들의 보복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장제스의 어머니가 세금(사실상 뇌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 왕채옥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일찍 사별한 충격으로 잠시 비구니가 되기도 했던 여자인데 22세의 나이로 45세의 장제스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남편을 잃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났는데 이방인이란 이유로 백안시를 당했다. 관리들이 장제스를 감옥에 넣었던 것은 그의 일가가 타향 출신이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 장제스까지 2남 2녀를 키우면서도 일상 예절, 신체 단련, 위생 상식, 가사 노동 등을 가르쳤으며 자녀들을 사숙에 보내기에 힘썼는데 이러한 교육은 장제스가 평생 엄격한 생활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장제스는 6세부터 16세까지 고전 교육을 받았고 17살에는 고향 계구진(溪口鎭)을 떠나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의 스승들에게 고전을 강의 받았다. 이후 1902년에 동자시에 응시하지만 무질서와 부패에 실망하고 과거 시험에 대한 미련을 끊고 만다. 이후 1905년에 쑨원에 대해서 최초로 인지하고 혁명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1906년, 장제스는 도일하지만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군사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본어만 공부하고 다시 귀국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다녔던 학교는 캉유웨이가 세운 청화(淸華) 학교였다고 한다. 이후 귀국한 뒤에 어머니를 설득한 후 통국육군속성군관학교(通國陸軍速成學敎) 1기생으로 입학하며, 졸업 후 좋은 학업 태도와 성적을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한다.그 시기에 그는 혁명의 보이기 위해 변발을 잘라 집에 보내는 선전 포고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후 1909년 중국 동맹회에 입회하며, 같은 저장성 출신인 중국 동맹회 간부인 천치메이(진기미)로부터 호감을 얻고 그의 정치적 제자이자 심복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진무 학교를 졸업해 니카타현 다카다시 야전 포병 13연대의 견습 사단으로 배치되었다. 

1911년 8월, 진기미와 장제스는 혁명이 발생할 경우의 전술 등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신해혁명이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한 봉기가 성공하자 장제스는 자신이 탈영병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군복과 군도를 학교에 소포로 부친 다음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천치메이를 도와 항저우 봉기의 결사대를 지휘해 이 공으로 2사단 5단(연대)장이 된다. 이후 천치메이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군사학을 공부하며 독일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전제화에 반발하여 반년만에 귀국하게 된다.

한편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이었던 천치메이는 장세스에게 황진룽(황금영), 두웨성(두월생), 장소림(장샤오린), 장징강(장정강), 다이촨셴 = 다이지타오(대계도), 천궈푸(진과부), 천리푸(진립부) 등을 소개해 준다.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모두 상하이 암흑계의 3대 대부이며, 특히 두웨성은 청방의 수장이자 그의 비밀 후원자였다. 장징강은 상하이의 거부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그가 당 총재가 되게끔 만들어 주었다. 다이촨셴은 장제스와 의형제를 맺어 훗날 중화민국 고시원장 직을 역임한다. 천궈푸와 천리푸는 천치메이의 조카들로 장제스의 충복이 되어 국민당 조직부, CC단, 중앙 조사 통계국(남의사(藍衣社)를 의미한다.) 등의 수장이 되며, 중화민국 4대가족인중 진씨(천씨) 일가를 이루게 된다.


또한 1913년경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이름 지청(志淸)을 버리고 이름을 중정(中正)으로 개명한다. 또한 필명으로 사용하던 개석(介石)은 자(字)라고 사용한다.

천치메이에 대한 장제스의 충성심은 대단히 높았고 천치메이의 정적인 타오청장(도성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병원에서 쏘아죽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은 타오청장이 장제스를 죽이려고 해서 정당 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상식적으로 병원에 혼자 있는 사람이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하겠는가... 여하튼 이후 장제스는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하자 천치메이와 함께 계축전쟁에 참여해 상하이 제조창을 공격했으며 이후 여러차례 봉기했지만 실패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로 중화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자 차이어, 량치차오가 봉기하면서 호국전쟁이 발발했고 천치메이와 함께 호국전쟁에 투신하여 위안스카이 타도에 나섰다. 이후 1916년 5월 천치메이가 위안스카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자 좌절하여 3년동안 상해 암흑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 32세의 나이로 14세의 천제루를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였고 쑨원의 호법운동에도 참가하여 천중밍과 함께 호법전쟁에 참전했으나 천중밍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주변의 견제로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였다.

이후 1920년 쑨원(손문)이 2차 호법운동을 이끌며 광동에 자리를 잡자 장제스는 쑨원을 따라 광동으로 가며, 곧바로 쑨원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쑨원을 이상론자라고 비웃는 천중밍과 노선 차이로 자주 마찰을 빚었고 또 다시 상하이와 고향, 광저우를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22년 광동 군벌천중밍(진형명)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총탄과 포화가 난무하던 시내를 뚫고 쑨원과 제2차 호법군 정부가 피신해 있던 군함 융펑에 승선하여 쑨원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류전환, 양희민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도움으로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를 다시 정복하여 정처없이 떠돌던 국민당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북벌과 반장전쟁
천중밍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대본영 참모장을 위시로 여러 군사적 중책을 맡으면서 쑨원의 신임을 확고히 받게 된다. 장제스는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면서 혁명 사업에 투신했고 쑨원의 명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 레프 트로츠키와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쑨원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해주지 않는다고 자주 불만을 표출하며 상하이나 고향인 시커우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자주 했고 이때마다 쑨원은 장제스를 달래야 했다. 이 시기 미하일 보로딘이 쑨원의 고문으로 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1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 군관 학교 개교일. 쑨원 등과 함께)


이후 소련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황푸 군관 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 혁명군 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점차 국민당의 실력자가 된다. 이후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상단군(商團軍) 제압과 천중밍의 군대 괴멸, 군민재정 통일선언에 반발한 운남 군벌 양희민(楊希閔)과 광서 군벌 유진환(劉震環)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들을 격파해 광주 위수 사령으로 임명, 광저우의 실력자가 된다.


1925년, 쑨원이 죽었다. 한국에선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쑨원은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일이 없고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쟁취했다. 쑨원에게 장제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측근 심복 정도의 위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동정을 지휘, 광저우를 탈환하려는 군벌 천중밍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장군으로써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었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쑨커의 태자파, 왕징웨이와 후한민의 당권파, 국민당 원로들의 노동파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지지하며 당권파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양희민, 유전환 등이 중앙의 말을 듣지 않고 반기를 들자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이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듣지 않고 광저우를 점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장제스는 쉬충즈와 함께 이들을 토벌하여 이들의 패잔병과 무기들을 흡수하여 국민당의 병력을 통일시켰다. 이 시기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매우 심하였고 특히 소련의 지원을 입은 좌파가 강성하여 당내 우파는 물론, 주변의 군벌들과 열강 세력의 우려를 사고 있었다. 놀랍게도 장제스는 이 시기에 좌파에 속했다. 장제스는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특별위원회에 참가하여 암살 사건을 수사했고 월군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고 그의 군사력을 흡수하면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성장했다. 또한 국민당의 2차 동정을 통해 최후의 발악을 가하던 천중밍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왕징웨이, 보로딘을 이은 국민당의 3대 거물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정'을 통한 하이난 섬과 광둥 지역의 확보로 군사적인 업적도 드높아졌다. 이 시기 중국의 여러 청년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의 좌우 대립은 사그라들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다.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밀월 관계이던 왕징웨이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의 커넥션을 의심했고 국민당 우파는 장제스를 좌파 똘마니로 보았다. 게다가 새 소련 고문인 쿠이비셰프가 장제스보다 왕징웨이를 지지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그는 다시금 소련을 방문하여 이 위기를 타개하려다가 소련에 간 사이에 실각할 점을 두려워하여 취소하기도 했다. 장제스를 지지하던 보로딘이 펑위샹과 회동하러 자리를 뜨자 장제스는 보로딘이 자신이 아니라 펑위샹과 연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즉각 자신의 권력 기반인 황푸 군관 학교를 정비하며 선제적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3월 18일, 중산함 사건에서 국민당 좌파의 장제스 납치 음모(?)를 뒤엎으면서 국민당 정부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후한민(호한민), 왕징웨이(왕정위)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쑨원의 후계자이자 국민당군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소련, 친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저우언라이의 귀뜸도 무시하고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민족이 아니라 소련에 충성한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소련 고문들을 추방했다. 이로써 기존의 서산회의파와는 구분되는 신우익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우한에서 사열을 거행하는 장제스>


1926년 7월 장제스와 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바이충시, 리쭝런, 탕셩즈, 탄옌카이, 리지선 등을 국민당에 끌어들였고 우페이푸, 장쭤린 등을 잇달아 격파하고 우한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허나 국공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장제스가 자신을 공격하는 소련 고문 보로딘 해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이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와의 내전에 돌입할 뻔 했으나 북양군벌과의 싸움 때문에 잠시 우한과 협력하여 북벌에 나섰다. 이후 우한 정부에서도 마일사변, 경제위기, 펑위샹의 분공요구, 코민테른의 5월 지시 등을 이유로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우한과 난징의 통합이 논의되었는데 우한에서는 통합의 조건으로 장제스 하야를 완강하게 요구했고 옛 동맹인 광서파가 이에 호응하자 장제스는 하야했다. 이후 우한과 난징의 통합인 영한합작이 이루어졌으나 당계전쟁,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 등의 내부 분열 끝에 장제스를 다시 추대하기에 이른다.

장제스는 하야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는 등 일본과의 합작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제루와 이혼, 쑨원의 처제이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쑹메이링(송미령)과 결혼하였다. 이후 탄옌카이 등 국민정부 요인들의 빗발치는 요청과 경쟁자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통해 1928년, 장제스는 드디어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다. 1928년 행해진 2차 북벌에서 장제스는 장쭤린의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만주로 퇴각하던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합류한다.

북벌이 완료된 후 장제스는 경제개발과 내부 안정화를 위해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벌들의 군사력 감축을 논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펑위샹(풍옥상), 옌시산(염석산),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실력자들은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군사력 감축안에 마지못해 동의했으나 실행을 놓고 결국 반발하였다. 또한 장제스가 각 지방 정치분회를 폐지하여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려 하자 제일 먼저 계계군벌의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노척평을 무단해임하는 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장제스는 이를 온화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결국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1차 장계전쟁을 진압하자 이에 분노한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키는 식으로 반란은 계속 확대, 1930년 중원대전으로 발전했다. 장제스와 반장 측 모두의 러브콜을 받던 장쉐량은 결국 봉천군을 이끌고 장제스 편에 가담함으로 장제스의 우세를 확고히 해주었다. 장쉐량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는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1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931년 2월,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그를 감금하는 탕산 사건을 자행하고 7월, 제3차 초공작전에 나섰지만 광동파, 광서파, 개조파, 서산회의파의 합작으로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1차 양광사변이 발생했다. 이는 갓 통일된 중화민국의 남북내전으로 발전할 뻔 했으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의 요구에 따라 1931년 12월 하야했으나 후임인 쑨커가 한달 만에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사퇴하면서 1932년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군사위원장으로 복직하였고 왕징웨이는 행정원장이 되어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2차 국공 합작과 중일전쟁
군벌의 세를 꺾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이를 갈아오던 공산당 토벌을 위해 1930년 겨울 초공작전을 시작하지만 국민혁명군의 한계와 군벌들의 비협조로 오히려 공산당에게 막대한 무기 지원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 1930년 12월의 제1차 초공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장제스는 기존의 전략을 재고하는 한편 정치공작을 강화하고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도로와 공장을 건설하여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력을 뒷받침했다. 이 때문에 초반의 지리멸렬한 패주와 달리 1932년 제4차 초공작전에서는 일부 소비에트의 분쇄에 성공하였으며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근거지에 쫓겨난 공산당은 유명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고 한때 수십만에 달했던 홍군이 옌안에 겨우 새 근거지를 마련했을 때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수로 몰락한 후였다. 이 과정에서 독일 고문 오토 브라운, 28인의 볼셰비키, 장궈타오 등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1인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이 '붉은 심장병'이라 불렀던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 만주 사변으로 본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과 토비 출신의 북방 군벌인 양후청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초공 작전은 공산당과 토벌과 더불어 군벌 세력 약화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앞세우는 한편 중앙군을 군벌 영지에 보내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군벌들이 이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쓰촨 군벌 룽윈을 비롯한 많은 지방 군벌이 공산당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태업 행위를 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복건사변,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만주 사변으로 인해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나면서도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했던 장쉐량은 아예 초공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태업을 할 수도 없었고 태업을 하면 자신의 근거지와 더 먼 푸젠으로 쫓겨날 처지였기 때문에 대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장쉐량 등은 "빈대를 잡으려다가 군벌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날려먹는" 초공 작전에 반발하여 비밀리에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접촉한다. 장쉐량은 101세로 죽을 때까지 시안 사변 직전에 공산당과 어떤 접촉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친국민당적 역사관을 가진 자들은 이 때 장쉐량이 공산당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본다.

마침내 1936년 12월 12일,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점검하러 시안으로 온 장제스를 장쉐량이 연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그는 장쉐량의 "공산당과 화해하고 일본을 물리치라"는 요구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풀려난다. 시안 사건은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장쉐량은 본래 장제스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가 죽으면 중국의 대일 항전 능력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발빠른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자신의 요구 조건에 동의하자마자 그를 풀어주었다. 장제스는 풀려난 즉시 항명을 이유로 장쉐량을 체포하여 난징으로 함께 돌아갔지만 장쉐량의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훗날 대만으로 함께 도망간 장쉐량은 거의 죽을 때까지 연금 신세를 당해야 했다.  

어쨌든 내키지는 않지만 2차 국공합작은 실행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 독일인 고문들을 초빙하는 한편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강력한 독일식 중앙군을 양성하고 이탈리아와 미국의 협조로 공군을 양성했으며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 난징 등을 공업화하여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중국이 건실한 국가가 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장제스의 권력도 약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후한민 체포에 반발한 국민당의 광둥 파벌, 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한 19로군이라거나 광시 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광둥군벌 천지탕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1931년 만주 사변을 획책하여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강탈한 일본은 러허 사변으로 만리장성 쪽으로 자꾸 영토를 확장하며 중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장제스는 힘이 부족하니 힘을 길러 나중에 맞서겠다는 방침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양측의 긴장은 노구교에서 폭발,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일본의 주전파들이 폭주하면서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야 만다. 결국 장제스는 기존의 방침을 포기하고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선포하였다. 

장제스는 초반의 전략적인 실수로 화북과 동해안의 핵심 공업 지역을 모두 잃고 충칭(중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자 부족과 왕징웨이를 비롯한 거물들의 배신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하면서 8년에 걸친 기나긴 항일 전쟁을 지도하여 마침내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이 대륙에서 붙잡아둔 일본군은 관동군을 합쳐 총합 410만으로, 필리핀, 뉴기니나 그밖의 섬에 전개한 일본군 전체의 몇 배에 달했다. 이 병력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로 동원되었다면 미국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했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장제스는 처형이자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과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장제스는 쑹칭링이 소련에 가 있는 도중에 소련에서 새 애인"들"을 만났다고 하는 등의 날조 기사를 퍼트리고 쑹칭링은 장제스가 5천만 달러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로 대응할 정도였다. 이유는 국공 합작을 지지한 쑨원의 노선에 대한 장제스의 반감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장제스를 푸른 수염 같은 자라고 부르며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결혼하려 할때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쑹아이링, 쑹메이링의 뜻이 확고해 물러선 것이며, 더구나 쑹칭링은 그 당시 국민당의 독재 정책과 공산당 탄압에 반기를 들었다. 1935년 이후 쑹칭링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하는 등 친공적 행동을 보여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8년 간의 전쟁 끝에 장제스는 230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침략자인 일본군을 물리치고 중일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얻었으며, 중일 전쟁 당시의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 그 전에 빼앗긴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았다. 그리고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어찼다.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이 상임 이사국이었고, 국력에서도 일본은 중일전쟁 때 여러 면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어 엎었다.


그랬기에 여러 삽질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시점까지의 상황은 장제스에게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와 국민당 내부의 시기상조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국공 내전을 재개하여 만주 깊숙히 진군하여 하얼빈까지 공산당을 몰아붙이면서 통일에 성공하는 듯 하지만, 어정쩡한 공세와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이 그에게 화를 불러왔다.

그가 미국의 마셜 장군의 사실상 강압적인 정전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은 만주는 당시 중국 최고의 공업 지대이었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장제스는 공산당과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지 않는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분노한 마셜과 트루먼은 만약 장제스가 진군을 멈추지 않으면 중국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5억 달러의 차관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물주의 압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7일 마셜의 개입으로 장제스가 진격을 정지하고 정전 명령을 내린 사건은, 그로서의 자신 일생의 최대 실수라고 회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바로 전날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의 포기를 건의할 정도로 중공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정전으로 인해 중화민국군 내부의 전력 이동 정지까지 겹치고...OTL 

하지만 국민당군은 중일 전쟁 당시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중일 전쟁 당시의 전투 의지는 사라진 상태였고 보급선과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너무 마구잡이로 진군하여 반격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붕괴되기 딱 좋은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탄탄히 해둬야할 후방 정리가 전혀 안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군벌들을 때려잡기 시작하면서 장제스의 중앙군을 제외한 군벌군의 대오들이 잇달아 붕괴되기 시작했다. 만주 일대의 주민들을 징병해 병력을 보충하고 소련군이 넘겨준 일본군 무기로 대거 무장을 하면서 오히려 전력이 강화된 공산당은 린뱌오군이 만주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했고, 이어 패퇴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펑더화이, 천이가 지휘하던 다른 방면군들도 일제히 반격을 하면서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선양, 랴오양 등지에서 국민당군은 참패했고 쉬저우 전역에서는 정면 대결에서도 완전히 패주하고 말았고 이에 고립된 부작의가 베이핑에서 항복하면서 공산군에게 막대한 인력과 무기를 안겨주어 공산군 숫자를 4백만명으로 늘리고 말았다.

이에 1949년 1월 21일 총통 직을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을 총통 권한 대행으로 두었으나, 진짜 목적은 서남부 일대에서 대규모 징병을 할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은 평화 협상을 하면서도, "전범 장제스를 넘겨야 협상에 응하겠다"고 요구했는데, 이는 국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공산당은 4월 20일 장강 이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만약 국민당군이 장강을 중심으로 철통같은 방어를 고수했다면 해군, 공군이 압도적인 국민당에게 승산이 높았겠지만, 화북의 처참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전력의 손실이 너무 컸으며 장제스의 군벌 약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홍군이 진격을 재개하자 장강의 방어 병력들이 집단으로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허망하게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장강을 건너 오자마자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 도시는 모두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국민 정부는 임시 수도인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2일 내륙의 옛 임시 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11월 29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청두로 다시 이동했으며, 12월 7일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장제스는 쓰창(西昌) 대본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후 12월 10일 타이베이로 떠났고, 이후 두 번 다시 대륙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부천대와 대만 시절
결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과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기반으로 본토 수복을 위한 철권 통치에 들어간다. 이 시기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혹은 경험)이라고 불릴 정도의 고도 성장을 누렸으나 그와 동시에 타이완 독립, 본토 수복 노선 중지, 민주화 요구등의 주장을 모두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이후 미국의 지원을 통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 타이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민국 정부가 UN에서 축출된 이듬해인 1972년 5월, 마지막으로 총통 취임식을 거행했다. 당시 취임식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는데, 장제스가 부총통 옌자간이 마주보는 장면에서 "형님, 안됐습니다(大哥, 不好了)!"라는 자막이 등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방영되고 있던 대만의 TV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고, 당연히 방송 사고였지만, 생방송 중에 나온 것이어서 불길한 장면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75년,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한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 로 말했다는 설이 있다. 공식적인 유언은 장제스가 사망하기 6일 전인 3월 29일 구술하고, 사망 직후에 발표된 "나는 상투를 자른 이래, 총리(쑨원)의 혁명을 쫓아 살아왔으며, 총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도로서 있지 않은 적이 한시도 없었다", "나의 죽음에 실망하지말고 삼민주의를 실천하고 대륙의 국토를 수복하라" 등의 내용인데, 이 유언은 오늘날 중정기념당의 대형 장제스 동상 아래에도 조각되어 있다. 

장제스의 장례식은 국부 쑨원을 모신 타이베이 국부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중화 인민 공화국과 수교를 준비하던 미국은 장례식에 농업부 장관을 대표로 보내려다가 중화민국의 항의를 받고 부통령을 보냈으나 불과 4년 후에 미국은 단교하게 된다.


살아 생전 장제스는 자신은 패배자이기 때문에 본토를 수복할 때까지 타이완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죽는 순간에도 중화민국이 본토를 수복할때 난징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탓에 장제스의 유해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다. 그의 유해가 안치된 타오위안(桃園) 현의 츠후(慈湖)는 장제스가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지며, 현재 중화민국군 의장대가 관리 중이다. 1988년 타계한 아들 장징궈 전 총통도 비슷한 형태로 안장되었고, 장제스의 유해와는 약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