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술수로 높은 자리에 올랐던 고은(시인) 이번엔 성추행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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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술수로 높은 자리에 올랐던 고은(시인) 이번엔 성추행 파문


2018. 3. 5.

고은 (시인)

본명은 고은태(高銀泰).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부에서 출생.

한국의 시인이다.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진보 성향 문학인들의 대부 역할을 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 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민예총'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으며 예술계의 반미 운동을 앞장서서 진두 지휘해왔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성폭력 추문으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일각에서는 교과서에서 제외해야한다는 논의가 있을 정도.

생애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바야시 도라스게(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 시인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좌익 활동을 했다. 특히 고은의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도 좌익이었다. 그의 외삼촌도 당직을 맡고 있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UN군이 반격하고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아버지와 함께 마을에서 도망쳤다. 때문에 고은의 최종학력은 군산고등보통학교 4학년 중퇴가 되어버렸으며, 공식적으로는 초졸(미룡초등학교 졸업)이다.

이때 학살당한 유가족들의 반대로 고은은 이후에도 군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70년대에 한번 고향에 내려왔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간첩으로 신고되는 바람에 14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난 적이 있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고은은 1991년 어머니 팔순 잔치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향 군산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살의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 군산에 있는 고은 생가는 복원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2006년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고은 생가는 2006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이후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완전 철거되어 현재 그의 생가 터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시 한 편과 문패만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과거는 고향에서도 서서히 잊혀져 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로 계속 거론되자 최근 군산시에서는 고은의 공적을 기리는 시단위 사업이 추진 중이고 기념물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2018년 성폭력 폭로 이후 기념 사업이 모두 중단된 상태이며 철거하라는 시민들의 민원이 이어지고 있고 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및 나레이터)를 하려고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서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1년 입산하여 승려가 된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일본 조동종 동국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고승인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법명으로 알려진 일초(一超)는 이때 효봉 스님에게 다시 받은 법명이다.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에 따르면 고은은 문단에 데뷔한 후 자칭 효봉 스님의 상좌(수제자)라고 말하는 등 효봉 스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명사 사냥꾼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 예로 말 몇 번 섞어본 것이, 몇 년 뒤에는 아주 잘 아는 사이로, 또 몇 년 뒤에는 죽마고우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대목이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에 한창 나돌던 고은의 성추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훗날 고은 시인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1963년 봄 고은 시인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시인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반독재 및 반미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서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자락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 시인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했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후술한 추악한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주민들은 다른 의미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 행보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및 반미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고 쓰여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 시인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 시인의 민주화, 반독재 활동이라고 내세우는 업적들은 반미, 친북, 친미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난감한 측면이 있다.


명사 사냥꾼

오늘날 고은이 노벨상 후보로까지 추대될 수 있었던 원동력

고은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데, 당시 불교계 내외로 상당한 존경을 받고, 가장 유명한 고승이었던 효봉스님의 상좌가 된다. 사로잡힌 악령은, 또 다른 효봉스님의 문도의 입을 빌려, 그가 무턱대고 계속해서 스승님을 찾아 어찌어찌 상좌가 된 것으로 묘사한 바, 시작부터 명사 사냥꾼의 기질을 다분히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상좌의 직함을 단 그는 이후 법조계, 문화계, 예술계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그의 타고난 말재주와 언변으로 유명 명사들이 쉬이 그를 함부로 대접하지 못하게 했고, 나중에 명사들이 타계하였을 무렵 고은의 자서전에서는 그가 '피를 나눈 것 처럼 절친한 사이' '둘 도 없던 벗'으로 포장되어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예: 효봉 스님의 상좌 → 문인들과 교류 → 문인들의 추천으로 등단 → 미당 서정주와의 교류 → 서정주 사후 그의 문단 위치를 물려받음

위와 같이 이어지는 명사 사냥 테크트리로, 고은은 특별한 시재(詩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자기 어필과 꾸준한 대내외 활동, 그리고 민주화 투쟁과 수감이라는 그의 이력이 삼박자로 맞아 떨어져 나중에는 노벨상 사냥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쾌속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노벨상 수상을 바라볼 수 없는 평범한 문인인지라, 계속해서 고배를 마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명사 사냥은 이후 대통령으로까지 발전되어 김대중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로, 그의 사후 묘비에까지 시를 써 주게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의 막연한 민족주의 정서는 북한에 대한 일방향적인 동경을 낳았고, 김정일을 지나치게 훌륭한 사람으로까지 평가하며 실제로 김정일을 만나게 된다. 그의 명사 사냥꾼의 자질은 한반도 내외에 걸쳐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반미, 친북, 반독재 활동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다. 이어 고은은 진보 문학인들을 결집하여 1974년 11월 18일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좌익)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대표에 취임했다. 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이름을 바꾸면서 진보계열 문인들을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이후 고은 시인은 진보-좌익 계열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었던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재창단되었다.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도종환을 신임 사무총장에 선출하면서 재창단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문열 등은 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갑자기 그가 좌익 문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70년대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했던 시인들이 주로 순수 문학계였다고 한다. 

고은은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1974년), 민주청년협의회 고문(1978년),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초대 부회장(1978년)으로 활동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79년 말 석방되었다. 그동안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고은은 79년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고 자평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 그러나 평소 좋지 않았던 귀 건강이 악화되어 옥중에서 귀 수술을 받고 얼마 후인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9월 17일, 이미 1974년 자신이 창설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창단했다. 이후 고은은 이 단체에서 의장, 부회장 등을 지냈다.

고은의 이러한 변신은, 본인의 추악한 악령을 감추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시대의 숙제이자 사명감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더욱 악이 번성하게끔 하였다. 이 악은 절멸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에 부역자, 동조자들로 인하여 엽색행각은 사소한 일,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정도로 묵과되었으며, 고은을 비난하는 것은 곧 민주화 정신의 문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 의미가 커져만 갔다.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 칼럼에서 고은은 악명 높은 독재자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칼럼에서 리비아가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미국 탓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주장이 북한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미국을 순수 악으로 상정하고, 그에 대항하는 국가들을 마치 혁명국가라고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접근했을 때 가능한 놀라운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는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훈련이 동아시아 긴장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이 주장 모두가 현재 가장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

1989년 고은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동시에 진보계열 문학인들의 방북을 추진했다. 고은은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중순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와 교섭하여 3월 27일 남북 작가 회의 회담을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27일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대표단 5명을 데리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경찰에 발각되어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은, 신경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 26명이 서울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조사를 받은 26명 가운데 25명은 범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조사 후 풀려났으나 고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사로잡힌 악령에서는 이러한 대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방북을 선수치고 싶었으나 빼앗긴 것에 대한 분, 그러나 이러한 일로 또다시 추앙받게 되고 떠받들여받게 되어진 씁쓸한 현실에 대한 비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민주화 이후의 행보: 민예총 창립 주도와 반미, 친북 활동

1988년 12월 23일 진보 예술단체를 총망라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창설하여 공동 의장에 취임했다. 출범 이후 '민예총'은 명실상부한 대표적 진보적 문예운동 연합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예총은 창립 10년째인 1998년 회원이 만명 수준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성장하여 2008년에는 회원이 1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민예총'은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 장갑차 사건 규탄,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 FTA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 건설 반대 및 주한미군 철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광우병 파동(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한미 을지훈련 반대 등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민예총'은 노무현 정부 시절 5년 동안 규모가 네 배 가량 큰 보수 성향의 '한국예총'의 85% 수준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고은 시인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찬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고은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1998년 7월에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에 포함되어 북한을 방문했다. 이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방북 당시 고은은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자신이 지은 즉흥시 '대동강 앞에서'를 낭독하고 김정일과 건배하며 김정일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친북적 / 과격한 민족주의적 발언

전두환에 축시를 바친 서정주는 민족의 죄인이고, 김정일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고은은 국문학계 큰어른?

독재에 대항한다던 시인이 최악의 독재자를 옹호하다

북한에서 돌아온 후 고은 시인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현대사중 가장 축복 받은 역사의 절정이라고 평했다. 8,15 해방, 4.19 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을 종합한 감격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인데, 김정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단현실에서 김 위원장을 비판하고 부정의 대상으로만 삼아 왔다. 그런데 내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보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고, 말을 잘하고, 속에 담아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을 지녔다. 시를 좋아하고 특히 영화 예술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굳이 말 하지 않아도, 김정일의 실체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악한 비정한 독재자였으며, 북한 주민들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고, 수 많은 수용소를 설치하고 공개처형을 실시하는 등 학살을 자행한, 한국의 히틀러에 다름아니다. 이런 김정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 자체가 고은이 얼마나 북한 내부사정에 무지했으며 사람을 평가하는 안목 자체가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같은 인터뷰에서 고은 시인은 뜬금없이 북한의 문화재가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말하면서 6.25 때 남한을 위해 싸워준 미국을 비난했다.

이어 평양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를 본따 민족 형식을 가미한 서울보다 나은 도시"라고 평했다.

노무현 정권이 시작되고 나서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과거 고은 시인은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을 예찬하는 시를 쓴 적도 있었다. 위에 나와 있듯이 고은이 이끌던 민예총은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보수 예술 단체인 한예총 보다 1인 기준으로 3배~4배 많은 지원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2003년 한 인터뷰에서 고은 시인은 당시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던 대북송금특검법를 거론하며, 대북송금을 옹호하고 특검법을 비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축소, 매장하고 오물을 퍼부으려는 행위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 고은 시인은 북핵문제는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 시인은 "미국은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하고 지키지도 않았으며, 제네바합의를 무효화시킨 미국은 기만적이다. 또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전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미제국주의는 전쟁을 시장화하고 있다. 신무기를 소비하여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 미국은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등 미국을 제국주의라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2003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예총'을 이끌며 이라크전 파병 반대 시위를 벌였다. 당시 고은 시인은 "지금 지구는 오만한 침략전쟁으로 불모의 행성이 되고 있다"며 미국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고은 시인의 반전메시지가 적힌 엽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2005년 7월 20일에는 100여명의 진보 문인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추모시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썼다. 이 시는 서울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지 곁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 재단 출범 당시 재단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2010년 이후로는 정치적 행보를 자제하며 조용하게 지낸 편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의식해서 정치적 행보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민예총' 지역 행사, 모임, 강연 등에 꾸준히 참여하며 회원들의 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011년 인터뷰에서 "자본주의의 타락으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마구 요동치고 있고 시장사회(자본주의)와 미국이 내리막 비탈길을 달리고 있다. 21세기 후반에는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가 가동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다시 한번 드러냄과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했다.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진보진영을 떠나서 민족주의적인 의식, 북한에 유화적인 풍조가 절정에 달했고, 또 오노 반칙 사건, 장갑차 사고,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해 전국민적으로 반미 분위기가 꽤 높았기에 2010년대 이후처럼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다가, 박왕자씨 피살 사건, 천안함,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반북 감정이 급상승하게 되면서 동시에 정권의 기조도 대북강경 노선으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정파적 활동을 줄이다보니 대중들의 고은의 정치성향 인식은 단지 진보진영, 민족주의적 성향이라는 이미지에 국한되어왔다. 한편으로는 노벨상 유력 후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르긴 했어도) 보수언론 및 정파에서 그다지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던 점도 감안해야 하겠다.


노벨상 후보?

한때 한국 문학의 자랑에서, 지금은 추악한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영원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노벨상 후보로도 지명될 수준이 아닌 시인이, 끊임없는 자기 어필과 문단 권력의 비호로 노벨상을 사냥하려 하다.

20여개국에 시가 번역되었고 오리엔탈리즘과 민주화 운동 경력같이 서양인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아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매년 여러 나라에서 그를 초청을 하며,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와 더불어, 그리고 한국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올랐던 것이 그러한 점을 보여줬다.

다만 노벨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 고은이 노벨상 후보에 올랐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노벨상은 후보를 선정해서 투표하는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올해는 누가 받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매년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노벨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에서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이다. 즉 후보 운운하는 것부터가 어떻게 보면 김칫국. 그래도 래드브록스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춘 이력이 있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된 것은 2000년대부터인데, 마침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또다른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때 인터넷의 전국적인 보급시기와 맞물려 오프라인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이름이 고은이었다. 이때부터 교과서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빈도가 늘었으며, 본인의 저서가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북유럽쪽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2000년 말 미당 서정주의 죽음과 맞물려 문학적 성취에선 비교가 되지 않음에도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수준의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2002년 외신에서 고은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나 그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으며 국내 언론은 ‘고은씨도 노벨문학상 물망에 올랐다’면서도 그 해는 여성작가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짧게 전달했을 뿐이었다.

2005년부터 고은의 노벨상 후보 이야기가 국내 언론의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이는 로이터 통신이 한국의 고은 시인을 두 번째로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꼽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당초 예상된 10월 6일보다 한 주 늦어진 13일로 바뀌면서 기대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 후보로 거론되는 까닭은 고은이 1990년대 이후 1년의 반을 국외에서 보낼 정도로 세계 각지의 문학회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학 알리기, 시 낭송, 초빙 교수 등 활발한 국외 활동을 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스스로를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소개하며 셀프 홍보를 하고 다녔으며 이런 고은의 노벨상 셀프 홍보를 한겨레신문 등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노벨상 후보설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마치 신빙성 있는 사실인양 확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건, 고은의 노벨상 후보 밀어주기는 일종의 꾸준한 홍보와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는 거짓된 아이덴티티를 적극 어필하여 외신에 알리는 데에 대한 방법론적인 꾸준한 도전이었을 뿐,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거나 한국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북유럽에서는 여러 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수여했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Cikada)상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한국 문단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박하다. 원로라서 대접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학적 담론이나 평론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반 대중에게도 대표작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 없다.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간간히 나오는 작품이고 이에 따라 수업시간에 다루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무렵에 나오는 뉴스기사 이외에 순수 문학작품으로 고은 시인을 접한 사람은 적은 편이다. 미당 서정주와 그 제자들이 주류인 한국 문학계에서 비주류로 밀려있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무렵부터 문단계의 원로로 자리매김했다는 억지주장이 있었지만 고은이 말년에야 미당과 멀어졌고 그 이전에는 미당과 친밀했으며 미당의 제자라는 말까지 불렸던 인물 중 한명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미당과 대등하다는 말이 아닌 것이, 고은은 그의 특이한 경력과 말재주로 명사를 사냥한 인사였기에, 미당과 시적 세계를 나누며 교감한 문우가 아닌, 다만 수시로 그를 찾아 그의 명성을 빌리고 훔치려 했던 2류 시인에 불과했다. 실제로, 미당 사후, 고은은 미당을 혹평한다. 살아 생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

그의 시 세계는 이상처럼 기념비적인 것도 아니며, 이육사처럼 강렬하고 지조있는 세계를 구현하지도 않았다. 윤동주처럼 널리 애송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를 작시하지도 못하였으며, "한국어의 화신"으로까지 평가되는 미당의 시 세계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그는 허무주의와 탐미주의의 탈을 쓴 채로 의미 없는 텍스트를 생산하여 시집이랍시고 배설했으며, 불교시절 때 배운 선문답을 교묘히 이용하여 해석하기 아리송한, 막상 해석할 내용도 공허한 의미 없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한국 최고의 평론가였던 김현이 말하기를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 자작농의 밋밋한 삶은 고양된 혹은 충전된 삶에 대한 감각이 마모되어 있어, 비장이나 장엄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묘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은 고은이라는 떠돌이의 의식이 자작농에 기탁한 가면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오문들,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라고 1990년 타계한 평론가 김현은, 고은의 문학적 위상에 대해 위와 같이 논한 바 있다. 이는 그의 실체를 명확하게 꿰뚫어 본 것인데, 일방적인 북한의 대한 옹호, 동경, 궤를 같이하여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성 발언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모든 노벨상 수상에서 계속 탈락한 데다가 2011년 수상자는 스웨덴의 시인인지라, 근 몇년간 시인이 해당되지 않아서 앞으로 시인 수상이 유력할 거라는 가능성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돌려 말하면 가까운 해 안에는 시인이 수상할 가능성이 급격히 줄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지라 추후 고은의 수상 확률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2012년에도 또 후보에 올랐다고 했지만 수상자는 중국의 모옌(莫言)이었다.

2013년 수상을 앞두고 본인은 "노벨상에 대한 내 소감은 12년도 넘게 한번도 없다." 란 인터뷰를 남겼지만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말만 저렇지 신경을 굉장히 쓴다고 한다. 최영미 사건으로 폭로된 고은의 실체를 추정하여 볼 때, 한 때 파계승이었다는 점, 엽색행각을 수시로 벌이고 60년대에는 "가짜 고은"사건을 자발적으로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거리낌없이 지퍼를 열고 자기 성기를 만지는 대담함으로 미루어 보아 고은은 절대로 고결한 선비의 정신으로 담담하게 노벨상을 대할 위인이 못 되며, 그 속에는 노벨상을 기어코 받아내어 시인들의 팡테옹에 묻히리라는 추악한 욕심이 자리잡았을 확률이 농후하다.언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점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하다. 물론 하루키는 세계적인 관심이고 고은은 국내 언론의 설레발에 가깝지만. 결국 2013년에는 캐나다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가 수상하였다.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통틀어, 자신들과 정치-이념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고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지원하려는 정책적 안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후 노벨 문학상은 줄곧 다른 이들이 수상했고, 성향이 반대되는 이명박 정부 이후론 몇년간 물먹은 것도 있고해서 이전보다는 노벨상에 대한 기사나 언급이 줄어든 편이다. 하지만 이미 벌려놓은 게 있는지라 지금까지도 매년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 뉴스기사를 통해 꾸준히 수상 후보로 언급되며 고은 시인의 집앞에는 기자들이 많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2016년 10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즌이 돌아왔고, 래드브록스 등 배팅 사이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이 유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고은 시인 또한 유력한 후보라고 발표해 또 다시 주목받았지만, 2016년에는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선정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1위로 예측되던 레드브록스 사이트에서 고은 시인은 11위였기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2017년 또한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서 다시 언론을 통해 고은 시인의 수상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은 시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언론에 이야기가 나온 이후 매년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 단골처럼 나오는 소재였으니... 참고로 2017년 래드브록스 사이트에서는 고은 시인은 4위로 예측했었다.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


유명 문학가 폄하

고은은 자신보다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유명 문학인들을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폄훼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상 평전, 한용운 평전, 미당 담론 등을 써서 별 근거도 없이 악의적인 중상을 가하며 이 시인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 전공 수업에서도 그냥 읽지 말고 무시하라고 한다.

애초에 정규적인 교육 과정을 밟아 문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시라면 모를까 평전을 쓴다는 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문학 작품의 창작과 평론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전혀 별개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평전을 쓰겠다고 나서서, 궤변을 출판까지 했다는 것은, 허명을 얻고 싶어한 그의 행적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게 올바를 것이다. 그가 쓴 글에서는 어떤 문학적 식견이나 통찰은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색깔의 선명성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만 잔뜩 드러난다. 그에게 이상이나 한용운은, 친일파와 퇴폐성을 죽도록 미워하는 고결한 자신이라는 허울을 꾸며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제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 되는 중상을 동원해 그들을 색정광과 친일파로 만들고는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을 한껏 추켜세운 것이다.



이상(시인) 비판

고은은 자신이 저술한 이상 평전에서 이상의 여성 편력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그에서 비롯된 시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을 가했다. 또 고은은 이상이 모던 보이적 용어를 파렴치하게 취득하였으며, 국문학적 소양의 부족에서 오는 혼란과 전문 용어 남용에 의한 자기도취를 일삼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고은의 이상 평전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나 지식조차 몰라서 써 놓은 헛소리나, 은근히 열등감을 내비치는 악의적인 문장들이 가득해서, 학부 수업 때는 그냥 읽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다. 막연하게 주워들은 고은의 명성에 기대감을 가지고 이상 평전을 집어든 사람은 세 페이지도 지나기 전에 짙은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하술된 괴작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와 더불어 전공자들 사이에서의 고은의 평가가 줄 잘타고 시인 흉내 잘 내서 학자연하는 늙은이 1 이상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이유.


만해 한용운 비판

고은은 자신이 지은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 한용운을 극렬히 비난하고 있다. 책에서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순수한 승려가 아니라 정치선동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일제시대 때 만해가 지조를 지켰던 것에 대해서 "(만해는) 어떤 사람보다 지배 본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고은의 평전에서 만해는 소영웅주의자로,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고은 시인은 만해는 "이기적인 성정, 늘 원한이 살아 있는 감정적인 품성 때문에 사찰의 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하루도 견디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는 사랑을 가진 일이 없고, 대중을 이용했으며, 대중을 극단적으로 모멸했다"고 주장했다.

고은은 또 만해의 신체시 '심'에 대해서도 '비속한 해설'이나 '붓장난', '승려들이 걸핏하면 지껄이는 정도의 사어(死語)'라고 폄하하고 있다.

만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탁월한 저서로 평가받는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해서도 현실인식이 부족한 치기어린 작품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만해가 불문(佛門)에 든 직후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한 것은 ‘허영’에 불과하며 폄하했다.

고은 시인은 만해가 온힘을 기울였던 잡지 <유심>에 대해서도 "공허한 배설물인 논설과 수필"이라며 최악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추가한 ‘공약삼장’은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은의 한용운 비판은 교수 시절에도 유명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 때마다 걸핏하면 열폭해서 한용운을 까댔다고 한다.

고은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스스로 옹호하면서 한용운이 그의 딸 영숙을 창씨개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면서 한용운을 까기도 했다.

고은의 한용운 평전은 불교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은 “고은씨는 만해를 정치적인 선동가로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 책은 만해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은 1988년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만해축전대회장, 만해마을 명예총재를 맡은 바 있다.

서울시는 만해 한용운을 비판하고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훼한 고은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사업으로 선정하여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 시인 기념관인 '만인의 방'을 개관하고 그곳에 3·1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했다.



서정주 비판

등단 초기인 60년대에는 등단할 때 자신을 밀어 준 미당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고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60년대에 가까이에 살며 자주 서정주를 찾아갔다고 한다. 아마도 뻔질나게 미당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었던 것은, 그의 특기인 '명사 사냥'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지, 그가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라고 언급하는 것은 이미 사로잡힌 악령에서 묘사된 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것이 사후에 육친의 정을 나눈 것 이상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처럼 매우 진의가 불분명한 발언이다.


고은은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서정주와 멀어졌다고 한다. 서정주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자 완전히 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다고 한다.


2000년 연말 서정주가 사망하자 고은은 2001년 '미당 담론'을 발표하여 서정주를 가열차게 비판했다. 고은은 미당의 초기작 ‘자화상’을 비롯해 ‘귀촉도’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등 작품은 물론 친일전력, 군사정권 협조, 개인 에피소드, 세계관, 철학 등 서정주의 모든 점을 티끌 잡아서 가루가 되도록 깠다. 게다가 그 비판과 분석이라는 것이 전문적인 것도 아니어서 어린아이들이 말꼬리잡고 늘어지는 식인데, 예를 들어 고은은 미당의 초기시 '자화상'의 첫 행 '애비는 종이었다'를 지적하며 서정주는 '노예근성'에 쩔어있는 자라고 비난했고, 이어지는 구절 중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라는 구절을 지적하며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노예근성과 수치심 결여 때문에 나중에 권력에 편에 서서 일신의 안전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 당시 고은의 서정주 비판에 대해 ‘용기 있는 행동’이란 호평이 많았지만, 일부는 고은 시인이 미당이 살아 생전에는 침묵하다 세상을 떠난 후 비판에 나섰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고은이 자신의 스승이며 초기 시절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서정주에게 이런 가혹한 비난을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서정주 사후 고은은 서정주의 이름이나 그의 호인 미당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 고유명사'라고 불렀다. "내 입에서 그 고유명사(미당 서정주)는 다시는 안 나옵니다. 그게 내 교양이죠."라고 말했다.


서정주는 이미 8.15 해방 전에 친일 행위를 했던 인물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1950년대에 자청해서 이승만 평전을 쓰기도 했다. 고은은 서정주의 정치적 성향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는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며 '시의 정부(政府)'라고 찬양하더니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돌변한 후 서정주를 만나지 않고 연을 끊었고, 서정주가 죽은 후 그를 부관참시 수준으로 비난했던 것이다.


박경리 비판

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 김지하 시인,

고 박경리에게 정확히는 비판이라기보단 모욕적인 욕설을 했던 것이 드러났다. 젊을 때부터 무분별한 언동과 사람 깔보는 것은 여전했던 듯.



기타

술을 굉장히 좋아하여 신년목표를 하루에 소주 100잔 마시기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해서 하루에 200잔을 목표로 잡았다는 일화도 있다.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한다. 일례로 예전에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고은이 강의 시간에 10분 지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길 "술 한잔 하다가 늦었다!" 라고 당당하게 둘러대었다고 한다. 한 기자가 고은이 술약속이 있다고 해서 점심 때 인터뷰를 잡았는데, 이미 반주를 하고 있길래 "나중에 술 드신다면서..."라고 하자 "다음날 깼을 때 누구와, 언제까지, 얼만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아야 술을 마신 거다. 이건 그냥 곡차다."라고 선언했다고도... 한 마디로 고은은 책임의식의 결여, 술과 벗하면서 거칠게 달아오른 흥을 추잡한 엽색행각으로 소모시켰을 뿐 그의 자유분방함은 겉치레와 기만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선 자유분방한 애주가 정도로 서술해놨지만 실제로는 술버릇이 매우 더럽다.


20대에 고향을 등진 이후 문인으로 성공한 후에도 고향에 남아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부모를 오랫동안 외면하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고향 군산에서는 그의 좌익 활동과 더불어 불효자 이미지까지 겹쳐 그의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이미지도 희석되어 군산시에서 고은 시비도 세우고, 고은을 기리는 여러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미투 운동으로 고은의 성범죄 논란이 생기자 군산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2018년 3월 2일 네이버-KBS뉴스9 ‘고은 성추행’에 고향 군산 충격…기념사업 모두 보류


2010년 김연아에게 헌정하는 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를 썼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평이 상당히 좋지 않아 노벨상 후보 자질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문체가 요즘말로 매우 오그라들고, 초등학생이라 할지라도 쉬이 쓸 수 있을법한, 전혀 말도 안되는 수준의 시였기 때문. 하나의 시상을 위해 수 없이 밤을 지새우는 시인의 열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 초등학생이 백일장에서 나름의 감명으로 휘갈겨쓴 졸작마냥 시를 못 써도 너무 못 썼다.


자녀로는 외동딸 고차령씨가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영국 런던에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현재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 고은의 외동딸인 미술가 고차령씨의 작품이 2012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광주12'에 전시되어 화제가 되었다. 고은 시인이 직접 아트페어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트광주12'는 출품작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비판에 쉽싸였다. 향후 출품작의 수준에 대한 심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저명한 미술가들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2012년 당시 대선에 출마했던 문재인 후보를 '숫처녀'에 비유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윤단우 작가가 다시 한번 이를 거론하며 재발굴되었다. 윤 작가는 "숫처녀를 칭찬으로 입에 올리는 인간이나 그걸 칭찬이라고 낼름 옮기는 인간(안도현)이나"라고 비판했다.


별세한 마광수 교수에게 호된 비판을 들은 일이 있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라며, 고은은 사실상 시인이 아니라 시인 흉내내는 정치꾼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마 교수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고은의 엽기적 엽색 행각이 수면 위에 드러나며 재조명을 받고 있다.



3.1운동을 심각하게 폄훼하였다.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작품

현재 고은 시인의 시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는 김연아를 예찬하는 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가 꼽힌다. 약칭 '고은 김연아 시'라고도 많이 불린다. 고은 하면 이 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는 수준이하의 시라는 혹평을 들으며 수많은 유머 사이트에 수년째 반복해서 올라오고 있다. 대부분의 평가는 지나치게 오글거리고 평범한 학생들이 백일장에도 쓸 법한 내용이라는 것.

2018년 미투 운동으로 고은 시인의 성추행 사건이 연이어 폭로된 후 이 시는 다시 한번 재평가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연아양을 보고 있었을지 끔찍하다, 더럽다, 토할 것 같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2016년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고은 시인의 이름이 올라왔다는 보도가 터졌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도현이 2012년에 주장한 것과 달리, 본인은 문재인을 포함해서 정치인은 누구든지 지지를 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

희대의 가짜 고은 사건

그의 기만과 사기극, 뻔뻔함은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은의 성폭력 의혹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그가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고은의 성추문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 동안 고은이 폭음을 하며 성폭력과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일부 문인들이 그를 경찰에 고발하는 등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당시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가짜 고은 사건이다. 고은은 자신의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자신를 사칭한 '가짜 고은'의 짓이라고 말했다. 고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짜 고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이라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가짜 고은'이 전국각지의 산중 사원에서 갖은 비행, 부녀농락, 협박, 사기, 가짜약혼 등을 저질러 중부서에서 수배중이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2년 '진짜 고은'이 종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환속하자 '가짜 고은'도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가짜 고은의 악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경주, 김천 등지에서는 한글 백일장 심사위원장, 한시대회(漢詩大會) 심사위원, 서울에서는 모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벌였다.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고은'이 나타나 추행과 기행을 일삼자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고은은 1968년에 자신을 사칭한 '가짜 고은'을 제주도에서 붙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거된 후에도 '가짜(?) 고은'의 악행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진짜 고은은 '가짜 고은'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유명함을 한탄했다. 

1970년대 중반에도 고은은 자신이 직접 사복형사와 함께 종로 '백궁다방'에 있던 '가짜 고은'을 검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추악한 악행을 일삼던 '가짜 고은'은 처벌되지 않았다. '가짜 고은'이 '진짜 고은'에게 "고은이 부러워서, 고은처럼 되고 싶어서 고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가짜 고은'은 이미 고은을 사칭하고 영문과 출신의 여대생과 결혼을 해서 홀어머니와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는 것.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새사람이 되겠다고 반성하는 '가짜 고은' 앞에서 '진짜 고은'은 고발장을 찢은 후 그를 용서하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문열은 고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이러한 고은의 해명을 빗대어, "해방뒤 이 나라에는 가짜 백작사건까지 있었지만 가짜 문인이 있었다는 말은 그의 연보나 자서전 이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기다 그 소동이 있었다는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전국적으로 가짜가 돌아다닐만큼 높지도 못했다. 그전에도 그 뒤에도 그보다 지명도 높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는 한번도 그같은 가짜 소동이 없고 그때만해도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던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가짜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고 꼬집었다.



고은의 성폭력 루머가 그 정도를 더해가자 결국 당시 고은이 몸담고 있던 순수 문학계 문인들은 고은의 행태를 보다 못해 그를 문학계에서 배척해 버리기 시작한다. 참다 못한 일부 문인들은 고은을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고은 시인은 자살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으나 곧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예비군들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다음날 깨어났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 속에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에 예비군들이 병원비를 지불하고 그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고은은 1974년 갑자기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변신했고, 이어 74년 11월 진보 성향 문인들을 결집하여 국내 최초의 진보 성향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진보 문학계의 좌장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은의 성폭력 루머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가짜 고은 사건을 용서해준 일화는 이후 고은 시인의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고은은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기 1년전인 2017년 3월 TV에 출연하여 당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아울러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해 "슬픈 일"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초기에는 퇴폐적, 퇴행적 일탈을 한 문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작가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춰야 한다"고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이문열의 폭로

1994년 소설가 이문열이 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발표하여 문학계에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던 문인이었는데, 유명 원로 스님의 수제자라는 명성을 이용해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 문학 지망생들을 농락하는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친 악행을 일삼자 일부 문인들은 그를 문학계에서 배척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주인공은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에는 민주투사로 변모한다. 그리고 오히려 더욱 유명 인사가 되어 자신의 권력으로 예전보다 더 심한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바로 고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당시 고은이 좌장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 등을 비롯해 진보 계열 문인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이문열을 공격했다. 당시 진보 문인들은 민주투사 출신이며, 현재 진보 계열 문인들의 정신전 지주인 고은을 의도적으로 비방하고 있다며 이문열을 맹비난했다. 당시 고은은 김영삼 정권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맹공에 이문열 작가는 "특정인물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자신의 출간 단편집에서 제외하기까지 했고 이 책에 대해 절판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때문에 이 작품은 1994년 출간된 중단편집 '아우와의 만남' 초판에서만 볼 수 있다. 이후 이문열은 진보 문인들에 의해 보수 문학인의 대표자로 낙인 찍히며 집중적인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이문열 작가는 절필하려고 생각하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4년, 고은의 명사 사냥, 이로 인한 승승장구, 그 뒤에 가려진 추악한 엽색행각을 보다 못한 이문열이 펜을 들고 이를 만천하에 고발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이 출판되었으나 이를 단순히 진영논리에 입각하여 한 진보 문인을 매장시키려는 의도로 곡해한 진보 문단 세력은, (당시 한겨레, 백낙청을 위시한 민족작가협의회 세력) 매우 극렬히 이문열을 매도하였으며 그를 비판하였다. 사실관계를 따지고 만약 그것이 실제임을 알았다면, 응당 고은이 비판받고 물러나야 했을 것이나, 제식구 감싸기, 내로남불, 그까짓(?) 사소한 일로 인해 대의를 그르칠 수 없다는 집착이 진실을 가려 고은의 추악한 실태가 재조명받지 못하고 묻히게끔 하였다.

2018년 미투 운동에 최전선에 선 최영미 시인이 그의 시로 고은을 천하에 고발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것에 반해, 그 당시 훨씬 높은 수위로 강도높게 소설적 표현을 이용하여 고은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만약 그 당시 정의가 바로세워졌다면, 노벨상 후보라는 문단의 오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2017-2018년 미투 폭로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그는 의자들이 서너개 이어진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정을 보고 누운 그는 바지의 지퍼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아랫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는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황홀에 찬 그의 주름진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 ” 흥분한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그는 우리들을 향해 명령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 - 최영미 시인 투고

괴물, 몇 십 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오르다

문단 권력을 이용하여 상습적으로 엽색행각을 벌인 추악한 실태의 고발

* 최영미 시인의 '괴물' 발표와 JTBC 보도

최영미 시인은 2017년 12월 '괴물'라는 제목의 거의 실명 고발에 가까운 시를 발표했다. 시 '괴물'에서 젊은 여자만 보면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En"시인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라는 구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은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말이 많았고 결국 시의 주인공 En이 고은인 것으로 밝혀졌다.

2018년 2월 6일 JTBC는 고은 시인이 그동안 공공연하게 제기되어 왔던 문단 내 성폭력 문제의 주요 가해자라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후 파문과 의혹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최영미 시인은 그동안 네 명의 문학인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는데, 그 네 명 모두 고은이 창단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던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라고 추가로 밝혔다.


최영미의 미투 이후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문학과 지성사' 설립자로 유명한 진보성향의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고은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다. '옛날부터 술좌석에서 시끄럽고 난잡스러웠다.',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라고 주장했다. #1 #2 김병익 뿐만 아니라 문단 내 성추행과 연루되었다고 거론되는 시인들이 고은을 옹호하는 한편 최영미를 비난하는 의견을 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반응

한편 최영미 시인이 지칭한 네 명의 성추행 문학인들의 소속 단체인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아직 새 집행부가 인수인계도 받지 않았다며 4월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면서 입장 표명을 미루었다.

이후 소속 회원인 이윤택까지 성폭력 논란에 휩싸이게 되자 '한국작가회의'는 사건이 터지진지 16일(2월 22일)만에야 고은, 이윤택 징계안 상정 및 처리에 대한 보도자료를 냈다. 이 징계 상정안은 3월 10일 이사회에서 통과여부가 확정될 방침이라고 한다. 이는 징계안이 가결되기 전에 고은이 직접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창업주인 고은을 징계하는 안에 대해 한국작가회의 내에서 반발이 상당하다고 한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한 여성 시인은 "고은 시인은 남자한테도 뽀뽀하는 천진한 분이고, 옛날 윤리와 지금의 윤리는 다른데 작은 흠으로 거장을 매장시키면 안 된다"며 작가회의 결정에 반발했고 한다.


* 고은 시인의 반응

고은 시인은 성폭력 파문이 일어난 후 한 언론을 통해 “후배 문인을 격려하는 취지에서 한 행동”이라고 해명한 뒤, 3월 4일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부인 성명을 낼 때까지 일절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2월 18일 고은 재단을 통해 수원시가 마련해준 광교산 자락의 주거 및 창작공간을 올해 안에 떠나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것”이라는 계획만을 짧게 밝혔다. 그러나 고은 재단은 "퇴거 방침은 최근 불거진 성추행 의혹 논란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을 그었다. 



* 연이은 추가 폭로

2월 27일 새로운 미투들이 연이어 폭로되었다. 

2000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는 고은 시인이 자신의 시집 출판 계약을 논하는 자리에서 중소출판사 여직원의 신체를 더듬었다고 한다. 고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직원은 회사에 피해라도 갈까봐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2008년 4월 고은 시인은 지방의 한 대학 초청 강연회에 참석했다. 행사 후 당시 20대 여성 대학원생 3명과 30대 문인(미투 폭로 당사자)과 5명이 함께한 뒤풀이 성격의 술자리에서 고은 시인은 20대 여성 대학원생의 신체를 만지더니 급기야는 바지를 벗고 고은 시인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2012년 5월에도 자신의 신체를 노출했다는 사실이 추가 폭로되었다. 작가지망생 이모 씨(28)에 따르면 광주의 한 행사에 초청시인으로 초대받은 고은 시인은 행사 뒤풀이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바지를 벗고 신체 일부분을 노출했다고 한다.

고은과 가까운 일부 문인은 사실상 고은 시인의 추태를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은과의 술자리에 여성 제자만 불렀다고 한다. 여성을 같은 문인이 아니라 접대부로 취급하는 저급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


* 최영미 시인 추가 폭로

2월 27일, 같은 날 나온 최영미 시인의 증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는데, 1993년도 즈음 탑골공원 한 선술집에서 고은 시인이 6~7명의 남녀 문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는 자위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의 발언이었는데, 황홀에 찬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위를 즐기더니 "야 니들(20대 여성 문인들 포함)이 여기 만져 줘"라는 명령까지 했다라는 것이다 # 주변에 있던 남자 문인들은 말리기는커녕 희죽 웃으며 상황을 즐겼다고 한다. 술집에는 시인 일행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일반인 손님 예닐곱 명은 더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누워서 황홀경에 빠진 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더니 술집여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유 선생님두-”라고 했다고 한다.


* 탑골주점 주인 한복희씨 반박문 발표

2월 28일 '탑골'주점 주인인 한복희씨가 최영미 시인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반박물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분은 승려출신이라는 자긍심이 항상 있었고 입으로는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언급 했을지언정 의자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만지고 그런 추태적 성추행 기행을 했던 기억은 아닌것 으로 안다."

고은 시인이 수없이 성희롱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위행위를 한 것을 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반박문이라고 나온 것이 오히려 고은 시인이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또 단순히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반박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유려한 필체와 화려한 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필 의혹까지 받고 있다. # 어차피 최영미가 아니더라도 고은의 성추행 및 성기 노출 증언이 여럿 나와 있기 때문에 비난을 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반박문을 기고한 한복희씨가 운영하던 '탑골'주점은 고은이 창설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매일 안방 같이 드나들던 아지트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은 한복희씨를 '한선생'이라고 불렀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30주년 기념식에서 한복희씨에게 감사패와 함께 준회원 자격을 부여한 바 있다. # # #


* 영국 가디언지 반박 성명 발표

3월 4일 고은 시인은 해외 언론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의 성폭력 관련 행위를 부인했다. 영국 언론 가디언지는 영국 출판사인 블루닥스 북스(Bloodaxe Books)의 고은 담당자인 네일 아슬리(Neil Astley)씨를 통해 고은 시인의 성명을 입수하여 발표했다.



"상습적인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에 대해 단호하게(flatly) 부인한다. 나는 한국에서 시간이 흘러 논란이 수그러들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관련 사실과 맥락을 접하기 힘든 나의 해외 독자들을 위해 분명히 밝힌다. 나는 나 자신과 부인에게 부끄러울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일 없이 계속 집필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아슬리씨는 “현재까지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한 사람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고발자들의 진술들은 입증되지 않은 것들 뿐이다. 성추문 스캔들로 인한 그의 추락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린 명사로서의 지위와 대중적 찬사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슬리씨는 또 “블루닥스 출판사는 여전히 고은 시인의 문학적 유산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블루닥스 출판사는 2012년부터 고은 시인의 시집을 출간하여 판매하고 있다.

아슬리는 현재 고은 시인이 종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회복 중이라며, 최근의 수술과 그에게 가해진 비난의 결과 인해 몸이 매우 약해진 상태라고 전했다. # 고은 시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디는 곳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은 시인은 불과 며칠 전에도 수원 광교 자택 정원에 있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된 바 있다.


* 최영미 시인의 반응

3월 4일 고은 시인의 반박 성명이 보도된 후 최영미 시인은 기자들에게 "고은 시인이 남은 마지막 기회를 날려 버린 것 같다. (고은 시인이) 사과하고 참회하고 용서받아야 하는데 참 딱하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최 시인은 SNS에 통해 "제가 괴물에 대해 매체를 통해 한 말과 글은 사실입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식기구가 출범하면 나가서 상세히 밝히겠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 박진성 시인의 추가 폭로

고은 시인의 성추행 부인 성명이 나온 다음날 새로운 폭로가 나왔다. 박진성(40) 시인은 3월 5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En 시인의 추행에 대해 증언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2008년 4월 C대학교에서 주최한 ‘고은 시인 초청 강연회’ 후 뒷풀이에서 고은 시인은 옆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의 손과 팔, 허벅지를 차례로 만지며 성추행했다. 피해 여성이 당황해했지만 고은 시인의 성추행은 계속 되었다. 이에 박진성 시인은 뒷풀이 모임을 주선한 K교수에게 항의했지만 가만있으라라는 얘기와 함께 묵살당했다. 성추행이 이어지자 피해여성이 저항했고 고은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퍼를 열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3분 넘게 흔들었다. 고 시인은 자리에 앉더니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말했다. 

고은 시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밖으로 나가더니 울고 있었고 박 시인은 그녀가 다 울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에 태워 보냈다. 박 시인이 돌아와 피해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자 술자리는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고은 시인은 그 여성이 “참석자 중 가장 젋고 예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때가 아직 날이 훤한 오후 5시였다. 당시 식사 겸 술자리는 방이 따로 있는 그런 음식점이 아니라 오픈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다른 손님들이 있었고 시인 일행의 술자리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 K교수가 2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얘기했으나 기분이 가라앉은 고은 시인은 싫다고 말했고 거기서 모임은 끝났다. 

"저는, 저와 그 당시 여성들만 당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문단에서 굴러먹은 지 17년째, 고En 시인의 그런 만행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30년 전 격려 차원에서 그랬다”는 고En 시인의 변명을 보고 또 한번 경악했습니다. 30년 전이면 1988년인데, 그 이후에 제가 들은 똑같은 패턴의 희롱과 추행들은 유령이 한 짓입니까? 어제 "부끄러울 일 안 했다, 집필을 계속하겠다", 고En 시인의 입장 표명을 보고 다시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정말 궁색한 변명입니다. 그의 추행과 희롱을 보고 겪은 시인만 적게 잡아 수백명이 넘습니다. 수십년 간 고En 시인이 행해온 범죄입니다. 문단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왜 노 시인은 부정하는 것입니까.

문단의 선배 시인님들. 고En 시인의 '성기 노출'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은 범죄입니다. 제발 모른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후대에, 그리고 당대의 여성들에게 당당하십니까. 고En 시인의 진정한 사과를 바랍니다. 묵살하지 마십시오. 그 당시 고En 시인에게 ‘성범죄’를 당했던 여성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방관자로서,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씁니다. 제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고En 시인님." 박 시인은 최근 고은 시인의 공식입장을 보며 참담함을 느껴 목격담을 밝혔다면서 최영미 시인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 박진성 시인



재평가 및 여론

"국민학교 중퇴하고 불교교단에 몸담았다가 그 당시 유명한 스님 밑에서 세를 넓히는 기술을 연마하더니 시 좀 끄적이다가 명문대 영문과 출신 마누라를 얻고(어찌 얻었을고? 서세원의 성폭행 결혼방식이 통하던 세상 그 이전 세대였으니 ㅠㅠ) 이런저런 처세에 능하여 그 자리까지 꿰찬 한낱 기회주의자 사기꾼일 뿐~ 저런 변태새끼가 평생 누리고 살아왔다니 기막힐 따름이오" - 네이버 베스트 댓글

국민에게 존경받던 문학 원로에서 한 순간에 파렴치한 성범죄자로 인식이 추락

현재 그 어느 곳에서도 여론과 인식이 매우 좋지 않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유사 자위행위를 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기를 만져달라고 요구하며, 노래방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등 너무나도 충격적인 증언의 연속이라 사람 고은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질 수도 없을 정도로 추락하였다. 게다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 버젓이 저지른 행위들이라기보단, 이미 60년대부터 축적된 엽색행각이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제가 되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깨달아 가기 시작하면서, 고은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다" "이토록 거대한 악이 지금까지 존경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평소 고은의 시에 아는 바가 전혀없었음에도, 이렇게까지 떠받들여지는 것이 이상하다 했는데, 그 주위사람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여줘서 그런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그토록 찬양했는가? 어이없다" 말하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소수의 지인들이나마 '작가의 도덕과 작품은 별개'라며그를 옹호해 주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고 되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상황. 사실 고은의 평가가 완전 나락으로 떨어지는데는 이 지인들의 옹호가 말그대로 결정타를 날렸다고 할수 있다. 옹호해주겠다고 나선 인간들조차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도 없고 '그때는 시대가 그랬다라거나' '그런 행위로 시인의 업적이 폄하되서는 안된다'는 소리 밖에 안나오면서 옹호자들조차 그런 일이 없었다고 도저히 말을 못할만큼 명명백백하게 그 짓을 했다는걸 역으로 입증해버렸기 때문.

이로 인해 1994년에 이미 이를 세상에 폭로한 이문열이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간 고은의 행태를 알고도 이를 묵인한 문단 권력의 추악한 협조자들에 대한 분노도 상승하고 있는 상황. 대중은 "아니 도대체 이를 알고도 묵인한 그들은 뭐하는 사람들임? 이게 과연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문학가들, 시인들이 할 일인가?" 하며 혀를 끌끌 차고있다. 


미투 운동에 대한 지자체의 반응

수원시는 2013년 8월 고은 시인에게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자락 아래 주거·창작 공간으로 마련된 '문화향수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고은 시인은 수원시로부터 수도요금, 가스요금 등을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그 비용이 연 1,000만원에 상당한다고 보도되었다. 이제 이에 대해 광교산 주민들이 개발제한구역과 상수원 보호법에 묶여 있는 지역에서 고은 시인에게만 특혜가 제공되고 반발하며 퇴거 집회를 열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은 "시는 생계를 이어가려는 주민들에게 고발과 벌과금을 부과하면서 고은 시민에게는 혈세를 들여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은 시인의 성추문 파문이 발생하자 이찬열 바른미래당 국회의원(수원시 갑) 등이 퇴거를 요구하는 등 수원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2월 18일 고은 재단이 1년 내로 퇴거하겠다고 밝히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고 있다.

수원시는 올해 고은 시인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문학 행사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원시가 고은재단과 함께 건립을 추진 중이던 '고은기념관' 설립에도 제동이 걸렸다. 이미 수원시는 고은문학관 부지로 팔달구 장안동 시유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염태영 수원 시장은 고은문학관 건립사업 벤치마킹을 위해 2017년 6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쾰른의 콜롬바 박물관과 스위스 발스의 온천단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시는 2017년 11월 21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사업의 하나로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 시인 기념관인 '만인의 방'을 개관했다. 그러나 1933년생인 고은 시인은 사실 3·1운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뿐만 아니라 고은 시인은 3·1운동의 의의를 심각하게 폄훼한 인물이다.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서울시는 3억원의 예산을 들여 의욕적으로 '만인의 방'을 꾸미고 여기에 3.1운동 관련 유물과 기념물을 전시했다.



그러나 '만인의 방' 개관 두 달여 만에 고은 시인의 성폭력 파문이 발생하면서 이곳을 폐쇄하라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2월 11일에도 서울시는 철거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도 내부적으로 상당히 난감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시민들의 지속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철거를 고려 중이다라고만 밝힐 뿐 계속 철거를 미루다가 급기야 고은 시인의 성기 노출 및 자위행위 폭로가 터지자 결국 고은 기념관인 '만인의 방'을 철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고은 시인의 고향인 군산시에서도 시민들의 당혹감과 충격이 이어졌다. 

군산시민들은 원로이신 분이자 군산의 자랑이라 생각했는데 군산의 큰 어른이라는 분이 성추행을 했다는 것에 지역망신을 당한 기분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군산시에서는 일부가 수원시를 떠나는 고은 시인을 고향으로 모셔오자는 반응들이 있었으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잠잠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군산 지역은 고은 시인이 태어난 고향으로 과거에 시인의 생가가 옥구군에 있었으며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 통합 때 통합 군산시로 편입되어졌고 군산에서는 배우 김수미, 개그맨 박명수 등과 함께 고은 시인을 군산을 빛내는 유명인으로 지정하고 있다. 군산에 있는 은파호수공원에 고은 시인의 시비가 있으며 군산 벽화마을 벽화에도 고은 시인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다만 고은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원래부터 고은 측에 반감이 있는 시민들도 상당히 많았다.

군산시청에서는 직접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았으나 고은 시인의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직접 이 문제를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태추이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