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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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주시경


2017. 10. 18.

주시경
한국어의 중세 시대를 끝내고, 근대성을 지닌 언어의 반열에 올려놓은 한국어의 아버지이자 한글의 아버지

대한민국의 국어학자이며, 언어민족주의자이다. 호는 '한힌샘', '한흰매'이며 별칭은 '초명 상호' 이다.
 
'한글'이라는 말부터 '한(큰, 많은, 넓은)' + '글'이라는 뜻에서 주시경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주시경의 제자들 또한 뒤이어 국어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을 쓰기 쉽게 다듬어, 한국어를 근대성을 지닌 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이바지했다.



생전

황해도 봉산군 출생, 본관은 상주이며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 어머니는 연안 이씨이며 주시경은 상주 주씨 17세손이다.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 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 나중에 우리말 토를 붙여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것.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길로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신학문을 접하여 그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순한글로 교정 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제국신문에 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했다.

그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다. 간호학교, 공옥학교, 명신학교, 숙명여학교, 서우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학교, 오성학교,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국어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삐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1907년 창립된 국문 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용어, 학술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두루때글'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두루때글은 주시경의 한자를 새김(훈)으로 읽은 것. 주시경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인 두루 주(周)/때 시(時)/ 글 경(經)의 훈독 부분을 차례로 붙이면 두루때글이 된다.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 있게 정리한 최초의 인물.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고 표현해도 된다. 마지막 저술서인 <말의 소리>에서는 서구언어학보다 앞서간 발견을 하였는데, 구조언어학적 논리를 자세히 창안한 세계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음운론에서 음소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에서 어소로 해당되는 '늣씨'의 발견이 그 좋은 예이다.

주시경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어느 날 주시경의 부인이 밥을 얻어 왔는데 주시경은 이 찬밥을 상추에 싸서 먹다 급체가 들어 차도가 없이 그대로 급사했다. 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정말 아까운 인재를 일찍 보내야 했다. 제자인 열운 장지영(1887~1976)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대놓고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다.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너무나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언급했다.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아직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하기 힘들다면, 비주류인 어문학에 손을 댄 데다 삶도 짧았던 이 사람이 왜 위인전이 쓰여지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근대화에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적 가족과 의절까지 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앞장서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진취적인 성격이었기에 그런 업적을 남긴 것이겠지만.

기타

주시경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북한의 초대 수령 겸 한글학자인 김두봉이다. 문화어의 기반을 닦았는데, 서울에 남았던 동문 최현배를 보면 남북한 모두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이 언어정책을 맡아 남북의 언어가 지금까지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한글날에 유독 세종대왕님에게 밀려 언급이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훈민정음이 넘사벽으로 뛰어났어도 오늘 날 한글과 비교시 얼마나 편하게 변했는지 생각하면 안타까운 사실.

배재학당의 졸업생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배재고등학교에는 주시경관이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본래는 기독교 신자였지만 물질적인 침략보다는 정신적인 침략이 더 무서우며, 외국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것은 이미 정신적인 침략을 받은 것이다 는 이유로 대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하지만 다시 기독교로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다만 이 주제로 주시경과 논쟁을 벌인 전덕기 목사는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