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셜록홈즈 소설가 '코난 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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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셜록홈즈 소설가 '코난 도일'


2017. 4. 23.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자 셜록 홈즈의 집필자이고, 그 외에도 잃어버린 세계, 마라코트 심해 등의 SF모험물을 써, 이후 추리문학과 SF문학, 호러 소설, 심지어 밀리터리 문학에까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으로 부친은 아일랜드계 카톨릭 교도의 후손인 잉글랜드인 이었고 모친은 아일랜드 출신 카톨릭 교도, 즉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 본업은 안과 의사. 당시 의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짧은 단편을 잡지에 기고하거나, 포경선의 선의 겸 선원으로 일을 해보는 등, 본업과는 관련 없는 경험을 많이 쌓았다. 의학 박사학위 취득 후 일반 개업의로 일을 시작했지만 손님이 워낙에 없자, 시간이 남아돌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첫 홈즈 장편 <주홍색 연구>를 1887년에, <네 개의 서명>을 1889년에 출간하여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출간 준비 중이던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의 편집장의 눈에 띄어 셜록홈즈의 단편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때 상당한 원고료를 약속받자 결국 의사 일을 때려치우게 된다.

셜록 홈즈로 폭발적인 명성을 얻는 틈틈이 괴기소설과 역사 소설에도 관심을 가져 여러 개의 중/장편을 썼지만, 역사소설은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1894년 <마지막 사건>을 통해 홈즈 시리즈를 종결시켜 많은 독자들로부터 비난과 아쉬움을 샀지만, 1899년 "얼룩무늬 끈"을 기반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면서 코난 도일의 부와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 무렵 그의 첫 부인 루이즈가 당시로서는 불치병이 었던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1901년, 보어전쟁에 자원하여 군의관으로 일시적으로 복무한 뒤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수십 편 써내며 애국심을 진작시키고 외국 언론의 비난에 맞선다. 본인은 기사작위를 보어전쟁에 대한 정당화 내용을 담은 글 〈The War in South Africa: Its Cause and Conduct〉를 써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2년 11월 11일자 관보에는 그를 포함 40명의 기사작위 서임대상자가 올랐지만, 서임이유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공식적인 서임이유가 특별히 나와 있지 않은 만큼, 전쟁 옹호 글을 썼던 것도 물론 영향이 있었겠지만 셜록 홈즈의 저자로서의 공헌도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처음에 코난 도일은 기사 작위를 받는 것을 꺼려했었다. 어머니의 닦달 끝에 결국 받기는 했지만, 이런 탓인지 소설 속 홈즈는 기사 작위를 거부하는 걸로 나온다.


1902년 홈즈의 부활을 원하는 독자들의 꾸준한(무려 8년 동안이나!) 항의와 요청에 못이긴 코난 도일은 드디어 <바스커빌 가의 개>로 홈즈를 복귀시키고, 이후 스트랜드지에 단편 <빈집의 모험>으로 완전히 부활시킨다. 그러나, 이후의 단편 시리즈는 코난 도일의 귀차니즘 덕에 실종 이전 시리즈보다 전반적으로 구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다수.. 단, 후기 장편 <바스커빌 가의 개>와 <공포의 계곡>은 과거의 장편 <주홍색 연구>와 <네 개의 서명>을 능가한다는 평.

푼돈벌이 겸 씹덕들 보라고 라노베나 써볼까? 90% 농담이지만 진짜 코난 도일이 겪은 상황이기도 하다.

코난 도일이 집필 활동을 한 약 50년 동안 그가 쓴 칼럼이나 비평 등 언론기고 글만도 수백 편에 이르는데, 그 중 몇몇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 언론들의 부적절한 논조를 공박.
이혼법 개정 협회 의장으로서 이혼 옹호 주장.
군인에게 방탄복을 입힐 것을 권고.
이 시기 흥미로운 것은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제2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예언했다는 것.
벨기에가 콩고 자유국에서 행한 잔학행위에 대해, 맹렬히 비난.
영국 사법부가 혼혈인 변호사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근거해 유죄 판결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여 사건을 직접 꼼꼼히 조사한 끝에 재판부의 결정이 틀렸음을 확신, 이를 강력하게 규탄. 이는 대중의 강한 관심을 끌어, 결국 무고했던 피고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침.
심지어는 영불 해협의 해저 터널이 가져올 이익을 예측하기도 했다.
이 무렵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지역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쉽게도 낙선. 하지만 그가 쓴 칼럼만큼은 큰 반향을 얻어냈는데, 아일랜드에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당장 굵직굵직한 것만 정리한 게 이 정도. 군사, 사법, 언론, 국제사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1906년 첫 부인이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자, 코난 도일은 이미 부인의 투병기간 중에 가까워졌던 여성 진 레키와 1년 후 재혼한다.

재혼 이후 새 부인의 친정집 부근에서 이구아노돈의 화석이 발견되자 코난 도일은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관심이 후에 <잃어버린 세계>를 탄생시키게 된다. 이 무렵 한 사진전에도 참석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기아나 고지에 있는 테이블 산인 로라이마 산을 유럽 최초로 등정한 임 투른의 강연회였다. 코난 도일은 로라이마 산의 독특한 풍광에 감격했으며, 이후 잃어버린 세계의 주된 배경으로 삼았다.

부친 사망 후 보였던 심령학에 대한 관심은 첫 부인의 사망 후 점점 커져, 여러 심령술사를 후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당시 유명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 "당신의 탈출 기술이 몸을 에테르화하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심령에 대한 관심으로 결국 1922년 코팅리 요정사건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당시 정신상태로 집필한 소설이 위에 기술된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안개의 땅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맘에 들었는지, 코난 도일이 심령술을 쓰는 영화가 나온다고 한다.

1927년 <셜록 홈즈의 사건집>을 끝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를 마감하고, 이후 몇 편의 아무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심령술이나 요정 관련 글들을 쓰다가 1930년 7월 7일 가족들이 지키는 가운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대학 시절과 선상 경험 등에서 나중에 홈즈 시리즈등의 소설에 반영되는 인물과 사건에 많은 영감을 얻었다. 홈즈는 그의 스승 중 하나였던 벨 교수와 그 외 몇몇 지인들의 성격을 합성하였고, <잃어버린 세계> 등의 생물학 박사 챌린저 교수도 도일의 의과대학 시절 교수였던 러더포드 교수 등의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예외로 홈즈 시리즈의 왓슨은 사실상 작가 자신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그의 가족사까지도 왓슨의 가족사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코난 도일의 부친이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것처럼 극증의 왓슨 박사도 알콜중독으로 사망한 형이 있고, 똑같이 결혼도 두 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왓슨이 개업 의사를 차리는 것도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인데, 병원 경영이 좋지 않았던 작가와 달리 왓슨은 잘나가는 개업의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작가가 대리만족한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역시 홈즈 옆에는 왓슨이 있어야했던 모양인지 왓슨의 아내가 죽은 이후 왓슨이 좋은 값에 병원을 팔아버리고 홈즈의 옆에 와서 예전과 같은 친교관계를 지속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병원을 산 사람은 대리인이었을 뿐, 실상 병원을 구입한 건 홈즈였다. 그 시절의 브로맨스는 이랬다!

셜록 홈즈 시리즈로 탐정-추리 소설을 반석에 올려 놓았고, <잃어버린 세계> 등의 SF 작들은 이후 다른 SF물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화 <킹콩>은 스토리 적으로도 <잃어버린 세계>와 연관이 있으며, 최초의 킹콩 영화는 아예 <잃어버린 세계> 영화 소품을 그대로 갖다 쓴 영화였다.

추리소설가보다는 역사소설가로 명성을 얻길 원했지만 그의 역사물은 인기몰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저히 셜록 홈즈 시리즈에 미치지 못해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 챌린저 교수 시리즈나 몇몇 단편 호러들이나 추리 소설(홈즈가 나오지 않은 단편도 몇 편 썼다.)은 추리소설과 더불어 팬덤과 학계, 문학계에서도 꽤 알아주는 반면, 늘그막에 나름 심혈을 기울였던 요정이나 심령학 관련 소설들은 그저 대작가의 한 때 실수로 묵살당하고 있는 상황. 최근 들어서야 미국 및 유럽의 팬덤과 학계에서조심스럽게 재평가되는 분위기.

셜록 홈즈를 죽인? 뒤 전 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뤄지고 집 앞에 셜록을 살려 달라는 영국인들의 청원이 이어지자, 코난 도일은 어머니에게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답신은 이러하였다. "코난, 네 마음을 잘 안단다. 그런데 셜록은 왜 죽인거니?". 이후 결국 셜록 홈즈가 부활하였는데,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을 듯. 

추리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 듯 하다.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홈즈가 실재한다면 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라고 말한 적도 있다. 피터 코스텔로의 <Conan Doyle Detective>라는 책에 따르면 코난 도일 본인도 여러 번 범죄수사에 엮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예로 가축 참살 혐의로 기소된 George Edalji라는 남자가 있었는데(1876~1953). 사진보면 알겠지만 인도계 영국인(조상은 페르시아계였다고)이라서 인종차별적으로 범인으로 몰렸다는 논란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그 남자는 시력이 나빠 사건을 저지르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증명함으로써 그의 무죄 석방을 도왔다.

그리고 실종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행방을 추리해낸 것 역시 코난 도일이다. 그녀의 차가 남겨진 곳이 기차역 근처라는 것을 보고, 그녀가 기차를 탔을거라고 추리해서 그녀가 내린 역을 유추해낸다. 3일 후 경찰은 애거서 크리스티를 그 역 근처의 마을에서 발견했다고.

또 주변에 해자가 있는 저택에서 살해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지 못해 용의자가 풀려날 상황에서 한 기자가 코난 도일에게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자, 코난 도일은 "해자를 수색해야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해자가 너무 얕아 그곳만 빼고 저택을 수색했다. 후에 기자가 이를 형사에게 언급하고, 경찰은 해자 속에서 썩어가는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면도날 잭 사건 때 경찰이 코난 도일에게도 의뢰했지만 그 역시 잡지는 못했다. 다만 잭 더 리퍼에 대해 추리한 적이 있는데, 펜을 익숙하게 쓰는 걸로 보아 고등교육을 받았고, 'fix it up' 등 당시 영국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어투를 쓰는 걸로 볼 때 미국 출신, 또는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일 거라고 추리했다. 그리고 잭 더 리퍼를 잡기 위해 신문에 편지를 공개해서 필체를 아는 사람들의 제보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건 꽤 말이 되는 의견이기는 하나 이미 편지는 공개된 상태였다. 참고로 후대에 미국 FBI의 프로파일러들 중 한 명이 필적을 공개하는 방법으로 연쇄살인범을 잡은 적 있다. 이 때문에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면도날 잭 사건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작가 본인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작품 안에서 잭 사건을 해결했다가 혹시라도 이후 그것이 틀렸다는게 밝혀지면 그 후폭풍이 엄청날게 뻔하다. 

셜록 홈즈가 작품 내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추리력이 본인이 봐도 과장이 심하다 생각했는지 코난 도일 본인이 홈즈와 같은 방식을 쓰지만 모조리 틀리는 허당 탐정 얘기를 쓰기도 했다.

일본 만화 흑집사에서도 특별 출연한다. 2014년 10월에 이 에피소드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데 캐스팅된 성우는 아사누마 신타로.

이외에 마크 프로스트라는 작가의 '세븐(영제 : The List Of Seven)'에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악의 제왕을 탄생시키려고 하는 어둠의 조직(?)과 대결하며, 어둠의 조직을 막으려고 같이 행동한 잭 스파크를 모델로 훗날 셜록 홈즈를 탄생시켰다는 설정이 나온다.

셜록(드라마)의 주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실제 32촌 관계라고 한다.



여간해서 깔끔한 필적이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속필작가였던 그는 초인종이 울리는 순간 글쓰기를 멈추었다가, 방해의 요인이 사라지면 중단했던 지점에서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부러운 기술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원고에 정정이나 내용 변경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초고가 거의 최종본으로 확정되었다.

동갑이던 영국 작가 제롬 K.제롬(1859~1927)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코난 도일은) 자기 집 거실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홀로 서재에 박혀 글을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을 더 좋아했다. 어떤 때는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슨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서 우리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펜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코난 도일은 환자가 거의 없는 시간을 글 쓰는데 이용했는데, 사우스시 시절 구입해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타자기는 제쳐두고 직접 손으로 원고를 썼다. 그 자신의 추산에 의하면 하루 작업량은 대략 3,000단어 정도였다. 어쩌면 좀 과장된 분량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의뢰받은 원고 양을 감안하면 대체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코난 도일이 펜과 잉크만으로 오늘날 작가들이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하는 속도를 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흠좀무... 게다가 이 수치에는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손목에 경련이나 반복성 피로감을 느끼지 않은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위의 어마어마한 일화를 보충하자면, 코난 도일은 대체로 깨끗하게 필기하여 정서하는 작가로 자필 원고들 대부분에 다른 아이디어를 적어넣은 흔적이나 수정 자국이 거의 없다. 즉,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써내고 별다른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출판한 것. 경악스럽게도 1891년 4월 1일 혹은 2일 런던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안과 사무실로 출근한 그날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에 착수하면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연작 세트 작업을 개시했는데, 코난 도일이 남긴 휴대용 수첩의 기록에 따르자면 "4월 3일 첫 번째 원고 발송, 4월 10일 「신랑의 정체」 완성, 4월 20일 「빨간 머리 연맹」 원고 송부, 4월 27일 「보스콤 계속 사건」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홈즈 시리즈가 1편이 통상 8,000단어였으므로, 불과 1개월도 안 되어 4편의 단편을 완성하는 무시무시한 집필속도를 보여준 것. 심지어 그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역사소설 3부작 『망명자들─두 대륙 이야기』라는 책을 집필할 때 일주일에 50페이지 비율로 썼다고 하는 데, 이는 24시간 동안 1만 단어를 쓴 셈이 된다. 여기에 더해 일주일 동안 4만 단어짜리 팸플릿을 2개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도일 자신의 기록에 따르자면, 분노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분노야말로 글쓰기에서 최고의 추동력이라고까지 했다. (이상의 언급은 『코난 도일을 읽는 밤』 125~126쪽에서 발췌했다.)

이 양반도 만만치않은 책벌레인데 높이 평가하는 단편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 "모르그가의 살인", 브렛 히트의 "로링 캠프의 행운"과 "테네시의 파트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모래 언덕 위의 별장", 리디어드 키플링의 "연대의 북 치는 소년들", "왕이 되려 한 사나이", 에드워드 블워-리턴의 "귀신들린 집과 유령들"이다. 또한 19세기 영국 소설 세 편의 걸작을 골랐는데 윌리엄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찰스 리드의 "수도원과 화롯가" 그리고 조지 메러디스의 "리처드 페베럴의 시련"을 꼽았다. 그 외에 조지 보로의 "리벵그로"를 칭찬, 미국 작품으로 워싱턴 어빙를 매우 칭찬하면서 "그라나다의 정복연대기"를 추천했다.(이상의 언급은 마이클 더다의 『코난 도일을 읽는 밤』 115~117쪽에서 발췌.) 약간 거짓말을 보태면 그 시대에 나온 웬만한 장, 단편소설은 최소 한 번 이상은 읽어본 셈.

사무엘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 1689.8.19- 1761.7.4)의 소설 "클라리사(Clarissa)"를 읽고 마치 현대의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매 장마다 폭죽을 터트리는 성급한 스타일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처음에는 지루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점차 그 분위기에 익숙해질 것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고민거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중략) 왜 시간을 그토록 아까워하는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가? 당신의 마음에 영원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책 세 권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걸작을 읽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것도 마이클 더다의 『코난 도일을 읽는 밤』 115~117쪽에서 발췌.)

잡지 굿 워드(Good Words)에 멜로물 장편소설을 하나 청탁받자 코난 도일은 '도시 저편에'라는 제목의 멜로 소설을 하나 썼다. 4만 2천단어 분량에 150달러를 받기로 했으며 청탁 후 3개월 후까지 소설을 보내주기로 했으나 코난 도일은 6주만에 작품을 완성시켰다. 다행히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다.

코난 도일은 피터 팬의 작가 J.M.배리와 절친했는데 그 둘은 공동으로 오페라 가사작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배리가 초안을 잡고 완성시킨 1막을 본 코난 도일은 "너무 진부하고 어설퍼서 크게 실망했다."고 한 후 1막 가사를 새로 쓰고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며, 악보 작곡가인 어니스트 포드와 함께 2막을 썼다.


여학교에 침입했다가 교장에게 쫓겨나는 두 젊은이의 위업을 다룬 그 오페레타의 제목은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 새롭고 독창적인 영국식 희가극 이었…지만, 줄거리는 천박했고 가사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악은 들을 만 했지만 특출나지도 않았다. 1893년 5월 13일부터 7주 동안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된 그 오페레타는 코난 도일과 배리의 최대 병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다. 공연은 완전히 실패했고 비평가들은 무자비하게 작품을 씹어댔다. 아일랜드가 낳은 최강의 명언 제조기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07.26 ~ 1950.11.02)는 잡지 월드에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라며 씹어댔는데, 그럴만하다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평이었다.

코난 도일은 1900년 4월 2일 보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블룸폰테인에 도착했는데, 그때 블룸폰테인에는 막 4세가 된 존 로널드 루엘 톨킨, 통칭 J. R. R. 톨킨이 살고 있었다. 부친인 아서 톨킨이 블룸폰테인 은행장으로 임명 받은 후 그곳에서 톨킨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이 7월 6일까지 블룸폰테인에 있었고 은행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둘의 조우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1902년 10월 24일 버킹엄 궁전에서 에드워드 7세에 의해 기사작위를 받게 된 코난 도일은 강한 불만감을 드러냈다. 서임식 때 입어야 할 예복이 비쌀 뿐 아니라 "금실 견장과 뿔 달린 모자까지 있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한 것이다. 게다가 서임식 자체의 위엄도 전혀 없다며 불평했다.

1899년 10월 23일 뉴욕 주 북부 버팔로의 스타 극장에서 처음 시연된 연극 <셜록 홈즈>는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는 1902년 1월 30일, 빅토리아 여왕의 상을 마친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앞에서 어전 공연으로 초연되었는데, 에드워드 7세는 홈지언이라 불릴 정도의 오타쿠였다. 에드워드 7세는 연극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셜록 홈즈 역의 윌리엄 길레트를 귀빈석으로 초대해 그와 너무 오래도록 사담을 나누는 덕에 관객들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공연이 끝나자 길레트와 코난 도일이 막 앞으로 나와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연극 초연이 연극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 이야기들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1903년 열네살이 된 찰스 스팬서 채플린이 급사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찰리 채플린의 첫번째 무대 연기였다.
(가운데가 피에트리 도란도, 왼쪽에 도란도를 부축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코난 도일.)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코난 도일은 마라톤 심판위원을 맡았다. 이 경기는 종래 40km 코스로 진행되던 마라톤이 출발점이 윈저 궁으로 바뀌면서 2.195km 늘어난 최초의 경기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선두로 달리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1885~1942)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완전히 탈진해 쓰러져버렸다(쓰러지기 직전 400m를 무려 10분에 걸쳐서 뛸 정도였다.). 그러나 코난 도일을 비롯한 심판진들이 몰려나와 도란도를 부축해 결승선에 골인시켰다. 그들은 인도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실은 2위로 추격하던 선수가 미국의 존 헤이즈였기 때문에 양키가 우승하는게 눈꼴시어서 그랬다는게 중론. 당연한 얘기지만 도란도는 실격당했다. 도란도는 울먹이며 왜 나를 실격하게 했냐고 분노했다. 영국에서도 미안해서인지 영국 왕인 에드워드 7세는 특별 황금컵을 수여했으며 미국 작곡가 어빙 벌린(1888~1989)은 도란도야말로 승리자라며 도란도라는 음악을 작곡하여 헌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9년에 미국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나간 도란도는 헤이즈를 24초 차이로 제치고 우승하며 설욕했다.
코난 도일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저택은 코난 도일 사후 더욱 유명해졌는데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1960년에 그 집에 새 주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에든버러 의대 출신으로 코난 도일의 후학들이며 그 중 한 사람의 부친은 대학 시절 코난 도일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 집에서 코난 도일의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했으며 콧수염을 기른 키가 큰 노인이 집 안에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코난 도일의 모습이었다. 그 유령은 빨간 표지에 까만 고무줄로 묶은 일기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1961년 여름에 유령 쫓는 의식을 벌이고 나서야 더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직후 도일 집안의 한 친척의 입을 통해서 코난 도일에게 정말로 빨간 가죽을 씌운 비밀일기가 있었으며 그 일기장이 어디론가 없어진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흠좀무. 이 사건으로 인해 코난 도일은 죽어서도 강령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돌기도 했다.

1930년 10월 7일, 영국 심령협회에서는 영매 아이린 가렛을 초청해 석달 전에 죽은 코난 도일의 영을 불러내기로 했는데, 나오라는 코난 도일은 나오지 않고(…) 당시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행선 R101호 추락사건의 비행선 선장 카마이켈 어윈의 영을 소환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추락사건은 이 행사 사흘 전에 벌어져 54명 승객 가운데 6명만이 중화상을 입고 겨우 살았던 참극이었다. 이 사건은 1987년 소년경향 지에서 별책부록으로 준 세계의 괴담에서 실화라고 나오기도 했는데, 이 책자에 의하면 여자인 아이린 가렛의 입에서 나오던 목소리는 어윈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로 자신은 코난 도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윈의 동료들과 유족들은 그건 어윈 목소리였다고 기겁했으며 녹음까지 해서 도일의 친척들에게 들려주었으나 그런 건 안 믿는다면서 무시당했다고 한다. 여하튼 어윈의 목소리로 자신은 도일이라고 하던 그것? 은 추락사고 원인과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위조된 고인류의 두개골로 유명한 필트다운 인 사건의 실제 주모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공식적인 주모자는 도슨이지만, 발표 당시부터 영국의 위대성을 진화론적으로 증명했다고 여겨진 발굴이 실은 발굴자의 아마추어적인 위조품을 이용한 명성획득극이었다는 진상발각 때문에 웬만한 고생물학자들이 진범이 누구더라고 지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령 스티븐 제이 굴드는 테야르 드 샤르댕이 진범이라고 주장하기도. 물론 현대에 와서 코난 도일 범인설은 전혀 아니라고 부정된다. 도일은 고고학이나 생물 뼈같은 것에 대한 접합같은 것에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성향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인 "네 사람의 서명"에서 보면 세포이 항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이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다만, 그 당시 영국시민으로서 제국주의에 호의적인 건 흔한 인식이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모리스 르블랑도 그렇고,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허버트 조지 웰즈 같은 경우는 백인 우월주의까지 더 곁들어 노골적이었으니... 하지만 위에 나온 것처럼 아일랜드 독립에 찬성 하거나 누명을 쓴 혼혈인을 위해 투쟁한 것 등 제국주의와 반대되는 올바른 행동도 많이 했다.

코난 도일은 말년에 심령술을 믿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의 작품 속 캐릭터인 셜록 홈즈는 끝끝내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비록 작가 스스로는 신비주의에 빠져들었어도, 처음부터 냉철한 캐릭터로 설정된 셜록 홈즈는 오히려 미신을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보통 작품 내 캐릭터는 작가의 사상이나 생각이 투영되기 마련이나 코난 도일은 이를 구분하고 캐릭터성을 지킬 줄 알았던 것이다. 메리 수같은 작품을 양산하는 작가라면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