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요계의 불멸의 전설 윤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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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요계의 불멸의 전설 윤석중


2017. 4. 6.

한국 동요계의 불멸의 전설, 어린이들의 벗, 영원한 동심을 가진 시인, 아동문학가 들의 대선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로 호는 석동(石童). 191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교동보통학교와 양정고보를 거쳐서 죠치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도 보통학교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할 정도였다니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낭중지추였던 듯.


첫 동시를 발표한 것이 15세(!) 때인 1925년이다. 데뷔작의 제목은 '오뚝이'. 이후 일평생 800편의 동시들을 작사하며 온 생애를 어린이들을 위한 동시와 동요를 짓는 데에 바쳤다. 춘원 이광수는 젊은 시절의 윤석중을 평하길, "석동 윤석중군은 조선 아기노래시인의 거벽이다. 그의 노래중에는 전 조선 아기네의 입에 오른 것이 여러 편이다. 그는 지금 이십이 넘은 청년이지마는 그의 속에는 사오세로부터 십이삼세에 이르는 아기네의 맘과 뜻을 겸하여 가졌다. 이른바 동심이란 것이다. 아마도, 또한 원컨대는, 그는 일생에, 그에게 백발이 오고 이가 다 빠져 오므람이 늙은이가 다 될 때까지 이 '어린 맘'을 읽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이라 평했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부친과 계모가 서산시에서 우익 세력에게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는데, 계모가 좌익 세력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부친이 북한군 점령 기간 중에 서산에서 요직을 맡았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자 윤석중은 가족들이 있는 서산으로 피난오려고 했으나, 부친이 '전쟁 통에는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 산다'며 만류해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 등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에는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1956년에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1978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또한 외부활동도 활발해서 1970년에는 어린이 회관 고문을, 1981년부터 1984년까지는 초대 및 2대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3년, 향년 93세(만 92세)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국민학교 내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 치고 윤석중의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거의 모든 학년의 교과서에 교육과정이 바뀌더라도 반드시 들어가는 명곡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어린이날 노래와 졸업식 노래가 바로 모두 윤석중의 작품들이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

그 외에도 대우그룹의 사가 <대우가족의 노래>의 가사도 그가 썼다.

약 800여 편의 동시들을 지었고 세대를 초월해서 지금도 어린이들이 많이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