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행위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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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행위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비효과"


2017. 1. 12.



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대기에 영향을 주고 시간이 지나 증폭되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는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orton Lorenz)가 1961년에 기상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낸 이 원리는 훗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예측이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출발은 과학 용어였지만 시발점이 된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큰 변화가 결과적으로 생겼을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처음에 로렌즈가 이 현상을 설명할 때는 나비가 아닌 갈매기가 사용되었고, 태풍도 브라질도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나비의 날개짓과 태풍을 연결 시키는 형태로 등장하면서 이 현상에 대한 인식이 단숨에 강해졌다. 이 때문에 갈매기의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키고 하는 이야기는 없다.이 가상의 현상은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한 의존성, 곧 작은 차이가 경이로운 결과를 부르는 사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간간히 브라질이 발음이 비슷한 것이 이유인지 베이징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원전은 위 로렌즈의 동료 과학자 필립 메릴리스(Philip Merilees)가 1972년에 정한 윗말 그대로이다. 이론이 나온 지 10년쯤 뒤의 일로 작정하고 만든 일종의 슬로건/모토이다.


이 이론이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로렌즈는 기상관측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 무언가 흥미로운 계산 결과를 발견하고 재확인하기 위해 다시 계산을 시켜봤는데 처음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와 그래프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당황한 그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따져보다가 상당히 황당한 결론이 나왔다. 그 이유는 바로 2번째 계산을 시도할 때 그는 계산 속도를 좀 더 빠르게 하려고 넣어야 할 수치 중 하나를 한 자리 정도 반올림해서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로렌즈는 이를 계기로 이 카오스 이론을 고안해냈다.


이를 학회에 발표하면서 나비 모양의 그래프(단순히 우연히 발견한 그래프로 그저 예시를 들기에 적합했다는 이유로 사용됨)를 이용하면서 위의 갈매기를 인용하였으나 이를 감명 깊게 들은 기자가 나비 효과라 명명하며 기사를 써버렸고 어느날 신문을 보니 자신도 처음 듣는 나비효과가 세상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나비가 쓰이게 된 이유로는 1952년에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SF소설 <천둥소리(The Sound of Thunder)>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1995년에 고려원에서 출판한 <시간여행 SF 걸작선>에 실려 있다. 이 작품에선 중생대의 나비 한 마리 때문에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바뀌어 히틀러같은 과격파 전체주의자가 당선된다는 단편 소설로 2005년도에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도 되었다. 2011년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타임 코드'.



예시를 먼저 들자면 2014년에 나지완이 아시안게임에 가서 군 면제가 되자 안치홍이 입대를 결심하고, 선동열이 불러서 설득하다가 임의탈퇴를 언급해 버려, 분노한 팬들 때문에 결국 감독을 포기하여 2016년 현재 김기태의 KIA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해에 수아레스의 이빨 때문에 콜롬비아가 수아레스 없는 우루과이를 꺾고 8강에서 만난 브라질의 에이스 네이마르의 척추를 수니가가 부러트려 미네이랑의 비극의 시발점을 제공했다는 것도 있다.


또 구전으로 내려오는 속담으로는 일본에서 '風が吹いたら桶屋がもうかる(바람 불면 통장수가 돈을 번다)'라는 속담과 영국에서 'For want of a nail, The horseshoe was lost(못 하나가 없어서 말 편자를 잃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예시를 보자

얘기를 하기 앞서, 1748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불완전한 종결을 맺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6년 당시 유럽 외교사의 일대 혁명적인 대사건인 동맹의 역전을 감행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반대로 영국과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7년 전쟁이 터지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결국 베를린이 함락되자 프로이센 국왕이 평소에 목에 걸고 다니던 로켓에 담긴 독약을 먹고 자살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이대로 7년 전쟁의결과는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날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 이길 것만 같은 이 7년 전쟁에서 한 가지 거대한 변수가 나타났다.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했고 곧 이어 어떤 무능한 황제가 재위를 하는 덕분에 7년 전쟁의 판도와 적대국이었던 프로이센을 통치하는 국왕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었다. 천성적일 수 밖에 없는 독빠였던 이 황제가 무조건적으로 프로이센에게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그 덕분에 전세가 역전이 되어 프로이센이 승리를 맞이하여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반면 프로이센을 지원해준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3세가 저지른 병크 때문에 민심부터 근위대등의 귀족들 까지 등을돌려 나중에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고위 귀족자제들이 주축인 근위대를 홀대하고 홀슈타인 출신 떨거지 양아치들을 데려와서 근위대대신 자신을 호위병력으로 삼은 것 때문에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 반란의 여파로 예카테리나는 차르 지위를 유지하려 귀족들에게 이권을 퍼 주는 식으로 반발을 무마하려다가 러시아의 고질이된 농노제까지 더 강화시켜버리게 된다. 이 때문에 재위중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고 러시아는 후진적인 전제군주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외교적으로도 훗날 프로이센을 적대하지 않고 폴란드를 분할해야 했고,러시아는 서유럽의 자유주의와 완전히 반대로 가게 된다. 한편 이 동맹의 역전의 여파로 엉뚱하게 당시 영국에 종속된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을 하는 수혜를 보게 된다.

만약에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그대로 패배하게 된다면 프로이센을 위시한 독일영토는 이전 시대처럼 다시 결속을 하지 못하게 300개의 제후국으로 분할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오늘날의 프로이센 왕국과 바로 아래의 역사의 운명을 바꿀 사건, 그리고 그 사건 덕분에 일어난 전쟁과 독일 제국의 탄생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독립을 했던 미국도 어쩌면 식민지로 계속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

1870년 7월경 라인란트-팔츠 주의 휴양지로 유명한 작은 마을에서 빌헬름 1세가 엠스에서 가진 회담내용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적개심을유발하기 위한 조작으로 바로 그 해에 보불전쟁이 일어났고 ,1871년 그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게 되었다. 이 패전으로 프랑스는 더 이상 서유럽의 육군 최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여파로 프랑스의 여론은 극도로 국가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정서까지 맞물리게 되어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럽에서의 사라질 줄 알았던 유대인 차별에 대한 충격을 깨닫게 되면서 시오니즘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 전쟁의 여파로 제국주의로 과도하게 팽창된 유럽국가들의 대립 때문에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번에는 독일이 패하게 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이란 굴욕을 치르고 보불전쟁때 부활한 반 유대주의 정서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발생한 음모론인 배후중상설이 떠돌아 다녔으며 나중에는 나치 정권이 이 음모론을 토대로 원동력이 되어 집권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켰으며 또 다시 배후중상설로 부풀린 반 유대주의 맞물려 인류 최악의 학살인 유대인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이런 거대한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나중에는 시오니즘의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국을 추진자는 이론으로 그렇지 않아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중동에서는 뜬금없이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과 그로 인해 생긴 여러가지 분란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21세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9.11 테러와 그 여파로 또 다른 분란들까지 일어나게 되었고 이 또다른 분란들의 여파 때문에 IS의 전신인 ISIL이 생겨나게 된간접적인 계기도 되었다. 게다가 ISIL 때문에 유럽 난민 사태가 일어났고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나치 망령의 재림이란 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경화의 위험에 빠졌으며 이 사태의 후폭풍으로 영국의 브렉시트까지 일어나게 되고 곧이어 터키에서 쿠데타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보불전쟁에서 이긴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다른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제국주의시대가 열리게 되고, 이후 독일 제국를 위시한 여러 열강들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에 진출해 무굴제국,카자르 왕조, 오스만 제국등이 멸망하게 된다. 게다가 이 제국주의 시대에 드러난여러 열강들 중 한 나라에서 그 악명높은 레오폴드 2세도 등장하고 콩고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 점령을 계기로 아프리카에서도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가속되고 있다.또한 식민지 쟁탈을 하면서 동시에 아프리카에 개신교, 가톨릭 선교사들이 많이 파견했고 중국 등의 아시아에도 파견을 했다.

하지만 이 파견된 선교사들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또 하나의 나비효과를 생기게 되는데 바로 1897년 11월 1일에 산둥성 서부의 거야현(현재의 허쩌 시)에서 독일인 선교사 두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거야 사건)이다. 이때 마침 아시아에 영향력을 넓혀보고 싶었던 당시 독일 제국의 통치자 빌헬름 2세는 이 사건을 구실로 같은 해 11월14일에 청의 산둥반도를 공격해서 점거하고 협상을 통해서 칭다오를 조차지로 획득하게 하게 된다. 이 사건만으로 칭따오 맥주의 탄생 배경이 되고 (2016년 현재 한국의 배우 정상훈이 오랜 무명생활을 끝내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결과까지 낳으며) 현재의 우리 일상에 영향을 주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영향을 받은 러시아 제국의군부 강경파는 삼국간섭을 통해서 일본을 압박해서 청에게 돌려주게 만들었던 바로 그 뤼순과 다롄을 1898년 조차지로 얻어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청, 일본, 영국,미국 등이 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합동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왕따시키는 것 처럼) 러시아는 국제적 왕따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 입지 변화는 당시 조선을 두고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태도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삼국간섭 직후의 베베르-고무라 각서나야마가타-로마노프 의정서에서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형태로 협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왕따가 된 이후에 체결된 니시-로젠 협정에서는 러시아는만주를 가지고, 일본은 조선을 확보한다는 형태로 점점 일본의 주도권이 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 군부나 황실로서는 뭔가 타개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고, 일본의 군부에게는 자신감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과 미국 등에게는 일본을통해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런 상황의 결과가 바로 세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러일전쟁이다. 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로마노프 왕조 통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여 멸망하고 또 뒤 이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의 건국이 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승리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확정된다.

또한 위에 나온 제국주의 사상에 1914년 6월 28일에 한 청년이 어떤 유명한 부부에게 총을 쏜 사건으로 기폭제가 되어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 결과 생긴 존슨 대통령의 민족자결권 발언으로, 3.1 운동이 일어나고, 결국 일본은 통치 방식을 바꾸게 된다. 또 이 때를 기점으로 친일파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많이 생긴다. 게다가 이 전쟁 여파로 제2차 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세계 대공황까지 덮치게 되었고 이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미스터리한 대공황 때문에 (1차대전 전후에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맹의 해체가 앞당겨져 결국 (협정계의 재앙인) 뮌헨 협정이란 병크로 결정타를 날리게 되면서 설립목적을 제대로 상실하게 되며 연맹의 해체와 동시에 2차 대전의 개전이 거의 확정이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자신감이 생긴 일본 제국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란 명분으로 대륙으로 손을 뻗어서 나중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고, 소련에게도 탈탈 털리게 된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소련과 미국에게 항복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선봉이 되었고, 결국 약 40년간 냉전이 지속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