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갇힌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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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갇힌 소년들


2015. 12. 14.


일제강점기 시절의 형제복지원


선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던 섬으로 방조제를 지을때 대부도와 연결되었다. 선감원은 이 섬에 있던 수용소로, 일제 시대 말기부터 1982년까지 존재했다.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지시에 의해 세워졌다. 농사 지을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섬주민들을 섬 밖으로 강제이주 시킨 후, 전국에서 부랑아로 지목된 소년 수백명을 섬으로 잡아들여 선감원에 가두었다. 부랑아들을 수용한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이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알려진바 없다. 독립군의 자식들도 수감 대상이었다고 한다.


선감원에 온 소년들은 강제 노역을 해야했고 잘못을 하면 처벌의 일환으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손톱 밑에 끼워넣는 고문을 하였다. 신념으로 가득한 독립운동가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문을 어린애들을 상대로 자행한 것이다. 게다가 섬이어서 소년들은 달리 나갈방법도 없었다. 탈출을 시도한 소년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거나 갯벌 쪽으로 나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살아남은 소년들도 전쟁 말기에 이르러선 군사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내몰렸다. 해방 후에는 선감학원으로 바꾸고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복지 시설이 된다. 


군사정권 시기에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다 수용하였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선감원에서 폭력과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섬을 탈출했던 임용남의 증언을 토대로 실화 소설 '뭉치'가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자료 없이 잊혀질 뻔한 선감원 사건이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선감원 부원장의 아들인 이하라 히로미츠가 사죄의 심정으로 쓴 아!선감도란 소설을 1989년 발표하고 선감원 위령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와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극우단체 회원들에게 살해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일본 전국에서 연설을 했다. 이하라는 1998년 당시 3천만원을 모급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안산시를 방문하여 모금약정서를 작성했다. 1999년 안산시에서 위령비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 일본인의 도움은 받지않고 안산시의 예산으로 세우겠다고 하며 이하라의 모금을 거절했는데, 갑자기 백지화되었다. 이후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집극으로 선감원을 다룬 '선감도'를 방영했는데 여전히 위령비는 감감 무소식이었다가 2014년, 위령비 건립 추진 16년 만에야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79세가 된 이하라 히로미츠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