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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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2015. 5. 28.

1538년 오와리 지방의 호족 중 하나였던 마에다 토시하루의 4남이다. 아들들 많은 집이 그렇듯이 살기 위해 당시 그 지역에서 영주로 세력을 떨치던 사람의 시동으로 들어갔는데 주군복이 있어서인지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아명은 이누치요, 좀 커서는 마타자에몬으로 불렸다.



키가 굉장히 컸다. 기록에 180cm이라고 나오는데 근현대 일본 남성의 키가 평균 160이 안 되었던걸 보면 16세기에 180cm 이면 100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한 큰 키다. 여기에 6m 길이의 장창을 자유자재로 써서 창의 명수로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런데 같은 시동이었던 쥬아미(拾阿弥)라는 자와 싸움이 붙었는데 그만 싸우다 그를 칼로 베어버렸다. 쥬아미는 노부나가의 이복 동생이기도 했던 관계로 오다 가문에서 내쫓겨 낭인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었다. 당시는 일본 내 영주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던 전국시대라 노부나가 역시 쉴 틈 없이 이웃 영주들과 싸워야 했고 토시이에가 활약할 만한 무대도 그만큼 많았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건 아니었지만 오케하자마 전투 등에서 오다 군을 돕는 공을 세워서 2년만에 용서받고 돌아왔고, 가문 내에서 지위도 더 높아졌다.

37세 되던 해에 오다 가의 으뜸가는 중신 중 하나인 시바타 카츠이에의 부장이 되었다.

당시 시바타는 주로 북쪽 전선(호쿠리쿠 등)을 담당했는데 여기서도 능력을 십분 발휘해 노부나가와 카츠이에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활약하던 도중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나자 그대로 카츠이에의 밑에 남게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천하인이 되는 듯 보였지만, 하시바 히데요시가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와 아케치를 토벌하는 바람에 오다 가문의 남은 영지와 후계자 문제가 미묘하게 되었다. 장남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 당시 니조 성에서 싸우다 전사해 둘째를 후계자로 삼느냐 셋째를 후계자로 삼느냐로 가신들이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아케치를 토벌한 히데요시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모든 일은 히데요시의 뜻대로 되었다.

이에 반발한 시바타는 자신의 근거지에서 군대를 일으켰지만 히데요시의 전략에 휘말려 대패하고 쫓겨왔다. 이 전부터 토시이에는 둘을 화해시키려고 본인이 직접 히데요시의 진중에 다녀오는 등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나중에는 카츠이에의 편을 들지 않았다.

배신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카츠이에는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결국 부인과 함께 할복 자결하였고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그 뒤 히데요시의 중요 가신 중 하나로 대우받고 에치젠, 카가, 노토의 대부분을 영유하는 대영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기 전 그의 벼슬은 차관급인 다이나곤이었으며 영지는 약 120만석으로 오대로에 포함되었으며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사부가 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를 이렇게 중용한 것은 물론 어린 히데요리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이유에서였다. 토시이에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도요토미 사후 문치파와 무단파로 나뉘어 싸우려는 것을 적극 중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을 하여 히데요시가

남긴 유훈을 지켜 지나치게 세를 확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비록 땅 차지한 것은 이에야스가 더 컸지만, 토시이에를 존경하는 히데요시 측 영주들이 많아서 아무리 250만석 대영주인 이에야스도 토시이에를 함부로 대할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다음해 토시이에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중재역이 사라지고 나서 히데요시의 바람도 무색하게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고, 그가 애써 쌓아놓은 권좌는 이에야스의 차지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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